과거의 최신 기술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현재 관점에서 보면 시시하고 촌스러운 것들이 많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디아2 확장팩의 시네마틱 동영상을 보면서
당시 CG기술에 엄청난 발전에 놀랐는데
지금 보면 참으로 허접스럽다.
혁신이라고 칭했던 과거의 다양한 것들,
예를 들면 패션이나 이야기,
기술 등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금방 유물이 되어버린다.
이야기의 발전에 대해 더 살펴보자.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 구조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간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중심 소재는 주인공의 서사이다.
이야기의 서술 방식도 바뀌기 마련이다.
디지털매체 철학자 플루서는
연속적이며 선형적(Linear)인 아날로그식 인식방식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디지털화로 인한 비선형적(nonlinear)인 코드로 인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나 사고,
인간의 상상력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TV 드라마나 시트콤들을 통해
비선형적이고 인물이나 이야기가 서로 엮이는 관계를 만들어
새롭고 복잡한 내러티브를 발전시켜나갔다.
이런 변화와 발전은 영화계에서 영향을 주었고,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다.
<펄프 픽션>은 싸구려 잡지에 담던 싸구려 단편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영상이나 캐릭터들도 싸구려티가 팍팍 나지만
<펄프 픽션>이 진짜 싸구려 느낌이 나는 이유는
해당 영화가 기존 영화의 서사 구조를 파괴하고
파격적인 스토리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로 인해 <펄프 픽션>은 제4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BBC 선정 미국 역대 최고 영화 28위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는데
7백만 달러 남짓한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전 세계적으로 2억 1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거두었다.
<펄프 픽션>은 크게 여섯 에피소드로 나누어져 있다.
1-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식당의 강도 커플
2-보스의 명령으로 황금 가방을 찾는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줄스(사무엘 잭슨)
3-마피아 두목과 승부 조작을 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를 어기고 거액을 챙겨 도망가는 권투선수 버치(브루스 윌리스)
4-두목의 정부인 미아(우마 서먼)와 빈센트의 데이트와 코카인 소동
5- 마피아 두목과 버치를 강간하는 게이 경관
6- 피범벅이 된 시체를 깨끗이 청소하는 해결사 '늑대' (하비 카이텔)
이를 보다보면 마치 서로 다른 6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재밌는 것은 이 에피소드들이 서로 얽히며 상호연관된 구조가 아니라
분절적이고 삽화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모든 에피소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파괴하고 역행하며 뒤틀면서 묘한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국내 상영당시 이런 영화 구조가 굉장히 생소했던 탓인지,
지방의 한 영사기사가 필름을 받아보고는
'필름이 이상하게 편집돼서 왔다.'고 생각해
시간 순서대로 재편집해서 상영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들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매우 흥미로워 하며 해당 필름을 갖고 싶었다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제멋대로 뒤엉킨 모습은
다인종 사회인 미국의 복잡성과 다양성,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을 표현한다. 왓
챠에서 한 누리꾼은 <펄프 픽션>을
"지상 최고의 싸구려 영화"라는 한줄 평을 남겼다.
싼티가 극에 달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혹은
아방가르드적인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어설프게 싸구려인 것보다
세계에서 가장 싸구려인 것이 낫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