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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 Aug 04. 2023

침묵으로

그리고 심연으로

내가 가진 신념과 믿음의 파수꾼으로서,

높고 두터운 마음의 장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증오 말을 쏟아냈고,

나는 옳고 객관적인 사람이라 믿음의 갑주를 입고 살았다.

날이 갈수록 내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거칠어졌다.

항상 화가 나 있었고,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곧 터질 기세였다.

나와 상관이 적은 이들에게는 다소 친절하게 보이지만,

내 생각과 반대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몇 가지 질문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내 신념과 믿음으로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었는가?

나는 더 행복해졌는가? 아니다.


정치인, 종교인, 회사 동료, 가족 등 직간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을 결정짓는 9할은 말이 아닐까?


혼탁하고 혼란하며, 거짓과 사실이 혼재된 말들이 난무하는 정치판,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군상들. 말이 더럽고 두렵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방에는 TV가 없다. 한번 켜 놓으면 밤늦도록 끌 수 없을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어, 앞으로도 TV를 방에 들일 생각이 없다.

말이 오해와 싸움거리를 생산해 내는데, 말을 통해 오해와 싸움을 그쳐야 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


나는 요즘 다시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말이 필요 없고, 적당히 조용한 환경에서 좋아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어휘와 표현들을 배울 수 있고,

작가의 생각을 귀담아듣고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문화의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만한 부분은 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말은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악에 개입했거나, 그 죄악 자체다. 이제, 말은 소통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 사이의 단절을 완성시키고 있다. 말은 말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훈, 에세이집 ' 연필로 쓰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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