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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매거진은 IT 창업 풋내기의 창업 초기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 이 매거진은 <흔한 문과생의 창업 도전 리뷰> 이후 이어지는 연재물입니다.
퍼플웍스라는 개발 에이전시에서 기획자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퍼플웍스는 굿너즈 창업 초기부터 많은 도움을 주던 회사인데 사업 3년 차에 너무 힘들어 대표님께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저와 개발자 친구를 직원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월급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사업을 계속하는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정작 저는 아무런 좌절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폐업은 하지 않았고 우주챗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디벨롭을 하진 못하지만 기존 이용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보수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3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스테이폴리오라는 파인 스테이를 중개∙운영하는 서비스를 1년 반 정도 함께 하고 있고 소송 관련 서비스, 동물 관련 서비스 신규 구축에 서비스 기획자로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에이전시 기획자라는 직무는 참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제 실력에 떳떳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괜히 나서지 않고 사장님의 언어를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을 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운이 좋게도(?) 대부분의 사장님은 개발자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체계로 개발을 요구하셨고 개발자는 사장님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답변을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즈니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저의 사업적 소견으로 사장님께 반박을 하기도 하며 비즈니스 기획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협업을 하다 보니 협업 방식과 커뮤니케이션의 비효율이 발생했고 이를 참지 못하고 나서서 조율을 하다 보니 어느새 관리자 비스무레한 역할도 맡게 되었습니다. 요즘 핫한 직무인 프로덕트 매니저가 대충 이런 일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더 잘해보고 싶어 따로 공부도 하는 중입니다.
월요일에는 A, 화수에는 B, 목금에는 C를 하는 식으로 자원을 분배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각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사장님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고작 1~2일을 일하는 셈이니 많이 부족하게 느끼실 겁니다. 그러면 저는 또 책임감에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도 합니다. 게임할 시간도 없어 게임도 접고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도 인생 밸런스 잘 잡는 INTJ로서 번아웃이 오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소화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법서를 읽으며 스킬도 좀 찍고 해야 되는데 사냥터에서 사냥만 하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1년 반 정도를 이렇게 구르다 보니 일기장에 '부족'이라는 단어가 줄기 시작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자책을 많이 해왔습니다.) 일에 자신감이 좀 생기고 어떤 성장을 했는지 눈에 보이기도 하네요. 사냥터도 어쨌든 레벨업이 되긴 하는 것 같습니다.
퍼플웍스에서 일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저와 함께 창업한 개발자 친구가 항상 옆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창업의 꿈을 잃지 않고 계속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일을 하며 배운 점에 대해서도 항상 공유했습니다.
사실 취업 후 1년 간은 사업적으로 나아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쓸만한 아이디어도 없을뿐더러 사업으로 인해 너무 지쳐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칼퇴하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너무 잘 쉬다 보니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마침 개발자 친구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제안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오죽하면 퍼플웍스 시니어 개발자 형이 너네 사업 안 하냐고 다그쳤습니다. 그 이후로 좀 더 정신 차리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회사는 바쁨의 정상 궤도를 달리고 있고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없으면 없는 대로 퇴근하고 1시간, 주말에 몇 시간, 평소에도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아이템을 디벨롭하고 있습니다. 많이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mvp 기준 기획 80%, 디자인 60% 정도 수준까지 왔습니다. 11월부터는 좀 더 여유가 생길 것 같아 디자인도 마무리하고 개발도 시작하려고 합니다.
믿을 만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짬이 좀 있다 보니 진짜 반응과 가짜 반응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데 이번엔 진짜 반응이 꽤 있습니다. 개발 시작하기도 전에 김칫국 먹는 건 좀 아니지만 그래도 창업자는 이런 희망으로 좀 더 버티고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앱 런칭을 하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자랑하고 스테이폴리오 직원분들에게 슬랙으로 자랑을 하는 상상을 합니다. 대학교 동기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상상을 합니다.
사용자가 얼마나 많을지,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얘네 진짜 또라이다 ㅋㅋㅋ' 정도의 반응입니다. 투자도 어떻게 받는지 모르겠고 이번에도 역시 잘 안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좌절하겠지만 괜찮습니다. 저와 제 친구는 백수가 돼도 책상 하나만 있으면 앉아서 얘기하면서 앱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저희의 마지막으로 숨겨둔 자신감입니다.
요새 개발자, PM 몸값 높다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래도 사업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1년에 한 번이든 2년에 한 번이든 사이드 프로젝트 방식으로라도 계속해서 앱을 만들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감성이 돋아 글을 써봤습니다.
돋은 김에 마지막으로 제가 만든 명언 하나만 적고 퇴장하겠습니다.
'백종원만큼 잘하는데 실패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