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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류 Oct 20. 2017

“아빠가 매일매일 좋아”

엄마가 되는 일도 두렵지만, 아빠가 되는 일 역시 두려운 일이다. 하는 일이 아니라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아빠가 되고 나면 더 늘어난다.      


저녁 8시 30분, 차를 주차하고 시동을 끈다. 이미 아이에게는 아빠가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울린 다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문이 닫히면서 두려움은 눈앞에 다가온다. 오늘은 아이 기분이 어떨까, 뭘 하고 놀아야 할까,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문 앞에서 비밀번호 4자리 가운데 첫자리를 누르면, 이미 반응이 느껴진다. 대문을 열자 소율이가 문 앞에 서 있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두 손을 배에 모으고, 장난스럽게 깔깔 웃으며 인사한다.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느낄 새도 없다. 율이가 잡아 끈 손에 이끌려간다.      


“아빠, 하얀 옷 보여줘”     


가방을 내리자마자 다가와 셔츠 속 런닝을 살펴본다. 셔츠를 빨리 벗으라고 성화다. 집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가지 말라는 신호다. 그러고는 색칠놀이, 풍선놀이 등 생각해둔 놀이를 차례로 열거한다. 율이에게 아빠는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존재다. 분명 같이 잠들었는데 일어나면 집안에서 찾을 수 없거나, 깜깜해졌는데도 집밖으로 나가는 불안정한 존재다.     


셔츠를 벗고 나니 바지를 벗으란다. 그러면서 “율이는 양말 벗었는데 아빠는 왜 안 벗어?” 얼른 양말을 벗고, 불안함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풍선을 가지고 거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율이 머리와 목덜미는 땀이 흠뻑 들어찼다. 깔깔 웃으면서 연신 “아빠 매일 좋아, 아빠 매일 일찍 와, 아빠 매일매일 좋아”를 반복한다.      


치카치카를 하고, 머리를 감고, 작은방으로 가서 책을 펼친다. 책을 보다가 율이는 잠이 들었다.      


율이는 엄마에게 ‘매일매일 좋아’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빠를 매일 좋아한다니 기뻐해야 할 일인가? 잠시 기뻤다가 고민에 빠졌다. 내식대로 율이 의사를 번역하면 이렇다. “아빠가 나랑 놀아주면 좋으니까, 매일 일찍 집에 와서 놀아줘야 해”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이다. 매일 곁에서 보살피는 엄마는 ‘매일매일 좋아’라는 말을 들을 수 없는데, 고작 1~2시간 함께 놀아주는 것만으로 아빠는 격한 애정 세례를 받을 수 있다니.     


아이는 뭐든 격렬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애정이든, 분노이든. 그래서 아이는 하던 일이 조금만 틀어줘도 세상 떠날 듯 울어버린다. 좋으면 껴안기는 물론 뽀뽀 세례를 쏟아낸다. 특히, 평소에 부재(不在)한 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가끔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엄마만 찾는 이유도 그렇다. 정말이지 재미있게 놀다가도 수가 틀리면 아빠는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다. 늘 옆에 있는 안정적인 존재, 때로는 집착으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와 관계를 엄마에게만 모조리 맡겨서 그렇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내게 아빠는 특수한 날 기억의 조각밖에 없다. 안정감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아빠가 등장하는 기억은 늘 불안함을 수반한다. 이 불안함은 엄마의 등장으로 다시 수면 아래로 잠든다. 우리 사회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엄마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전까지는 아빠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편이 아빠에게도 좋다. 아빠가 생에 걸거치는 장애물로 인식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시간이 지나 “아빠가 매일매일 좋아”라는 말을 듣지 않는 평범한 시간 속에서 율이와 즐겁게 웃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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