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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트린 Mar 31. 2019

이것이 견생 역전, 늙은 개가 웃는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몇 번의 기적을 만날까? 뉴스나 영화를 보면 그저 별일 없이 사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순간은 극히 드물 것이다.

방치된 늙은 개좋은 주인을 만나 마당 넓은 집에서 살 확률 그런 기적의 확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동화 속 해피엔딩에서나 가능한 기적.



2년 전 겨울, 장사하던 상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자 가구점 사장님은 몇 가지 물품을 남겨두고 가게를 이전했다. 주차장에서 묶여 지내다가 일주일에 두 번씩 나와 산책을 하게 된 열네 살 늙은 개도 주차장에 남겨졌다.


사장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쯤 들르는 눈치였고 늙은 개 흰순할먼은 주차장 개집에서 홀로 겨울을 났다.

물을 부어주고 돌아서면 몇 분도 안 돼 얼어버리는 날씨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물과 사료, 30분의 짧은 산책이 전부였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 매일 잠깐씩 흰순할먼을 찾아갔다.


그렇게 석 달여가 지나고 봄이 왔다.

흰순할먼은 한 살 더 먹어 열다섯 살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걸음걸이엔 힘이 빠지고 눈빛은 더욱 쓸쓸해졌다. 어쩌면 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동물보호협회나 SNS 그리고 온갖 지인을 동원하여 흰순할먼이 머물 만할 곳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늙고 덩치도 있는 잡종견이 갈 만한 곳은 없었다. 건물의 강제집행이 시작돼서 정말 갈 곳이 없어지면 그땐 어째야 하나, 우리 집 중문 밖에라도 데려다놓을까 남편에게 의논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가 4마리나 있는 우리 집에선 동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느 주말 오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구점 주차장에 갔는데 개집이 비어 있었다.

놀란 마음에 허둥대며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바쁘게 돌아오는 옆가게 사장님을 만났다. 흰순할먼과 산책에 나서면 "잘 다녀와라." 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주던 분이었다.


나를 본 그분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흰순할먼이 갈 곳이 생겨 지금 그곳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장님의 친구분으로 마침 얼마 전 키우던 개를 잃어 흰순할먼의 상황을 듣 선뜻 키우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사장님과 함께 찾아간 그 집은 꿈에서나 그려볼 만한 곳이었다.  

한적하고 넓은 마당과 나무 그늘, 그리고 어느새 준비된 깨끗한 개집과 이불, 그리고 길게 묶은 목줄까지.


마당에 들어서니 가족들이 평상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참 평화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너무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은 그분들은 담담하게 웃으며 개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오라고 말해주셨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서는  어제만 해도 세상 다 산 것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흰순할먼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 곳이라고, 나 이렇게 좋은 집 생겼다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만큼 기쁘고 행복한 풍경이자, 겨우 하루 사이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노견이 입 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흰순할먼을 잠깐씩 돌보면서도 나 역시 이 늙은 개가 입양을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첫 주인에게는 학대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두 번째 주인에게는 버림받다시피 방치당한 이 개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이 거리나 개장수, 또는 보호소에서의 안락사가 아니기만을 희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말없이 관심을 가지고 돌봐준 많은 분들의 애정이, 없던 길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가서 본 흰순할먼은 목욕을 한 듯 깨끗한 모습이었고 그 옆에서는 손주뻘 되는 어린 강아지가 흰순할먼보다 더 격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쓸쓸해 보이던 흰순할먼의 얼굴은 어느새 웃는상으로 변해 있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자랑하고 싶은 기억이다.


 



그리고 흰순할먼의 기적은 열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생생한 현재 진행형이다. 

이것이 말년복 넘치는 댕댕이의 진정한 견생 역전 아닐까.


(*<이웃집 늙은 개의 첫 산책>, <사는 게 힘들어도, 산책은 계속된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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