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행동은 얄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행동의 이유가 명확하고, 그 이유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SBS <녹두꽃>의 백이화가 그렇다. 그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수시로 친정에 찾아온다. 이화는 제 아비(박혁권)는 물론이고, 동생 이현(윤시윤)에게마저 남편의 장래를 부탁한다. 배 다른 동생 이강(조정석)에게는 눈을 흘기지만, 강제 징집되는 이현에게는 끝까지 쫓아가 돈을 쥐어준다. 타인을 대하는 기준이 명확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앞뒤 재지 않는다. 모두가 가난에 허덕일 때 제 잇속만을 챙기는 속물. 이화는 당연히 이기적이다.
이 모든 것은 가족 때문이다. 권력도 부도 애매한 남자와 혼인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가 “사위도 자식이라는데 김 서방도 챙겨주면 안 되나” 같은 대사를 달고 사는 이유다. 이현이 이강과 한 식구로 지내자는 의견을 냈을 때 반대하는 것도 어머니 채 씨(황영희) 때문이다. 이화는 아비가 몸종을 범해 낳은 자식인 이강 때문에 제 어미가 속 썩어온 세월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어미를 대신해 분노한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어지러운 집 밖의 상황을 부모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장녀의 깊은 속내를 느낄 수 있다. 이기적인 그의 행동이 옳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제 가족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화를 미워하기란 어렵다.
백은혜는 주로 감정을 숨김없이 꺼내놓는 인물을 맡아왔다. 연극 <생쥐와 인간>에서는 외딴 목장에 살면서도 자신의 답답함과 꿈을 이야기하는 컬리 부인이었고,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은 ‘토론’ 자체를 연극에 담아냄으로써 주장을 마음껏 펼쳐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만큼,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감수성도 좋다. 2018년 공연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가부장제가 대물림되는 집안에서 억압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었다. 백은혜가 맡은 막달레나는 아버지가 다른 큰 언니의 결혼에 대해 남들은 눈치 보느라 못하는 말을 서슴치않고 한다. 제 삶은 체념하면서도 자신의 직계 동생들만큼은 끔찍이 챙기고, 사이가 좋았든 나빴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는 유일하게 눈물을 흘린다. 막달레나는 집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순도 100%의 고통을 느끼고, 그 감정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감정으로 뜨거운 인물은 백은혜가 갖고 있는 큼지막한 이목구비와 더해져 시너지를 냈다. 특히 다채로운 표정은 기존의 호흡과 전형성을 살짝 비튼 B급 코미디에서 더 자주 쓰였다. 전형적인 모범생을 벗어난 뮤지컬 <이블데드>의 린다가 그랬고, 지고지순함을 뒤집은 음악극 <밀당의 탄생>의 선화공주가 그랬다. 그중에서도 뮤지컬 <난쟁이들>의 사랑을 잃고 자책하는 인어공주는 그의 대표 캐릭터로 손꼽힌다.
백은혜는 외모에서 비롯되는 밝은 에너지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긍정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리고 다시 그 이미지를 전복해 페이소스를 만든다. 그 사이에서 인물의 층이 겹겹이 쌓이는 것은 물론이다. 다양한 레이어 중 일부가 관객과 맞닿지 않는 적은 없다. 그러니 이토록 이기적이고 얄미운 행동이 나의 신조와 다르더라도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