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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Nov 17. 2019

전혜진이 지켜내는 존엄

생기 없는 화분의 부활.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를 송가경(전혜진)의 이야기로 본다면, 이 드라마만큼 기혼 여성의 자아발견과 실현을 고스란히 담는 작품도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경의 서른아홉해는 타인의 시선 안에 갇힌 삶으로 정리된다. 부모와 시댁, 남편과 회사 대표, 배타미(임수정)와 차현(이다희)으로 대표되는 후배들, 심지어 동서 관계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삶. 자신의 성취마저도 모조리 누군가에게 귀속되어 온 평생의 경험이 냉소와 무기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전혜진은 이런 가경을 채도가 낮은 의상과 권태로운 듯한 저음, 억양이 도드라지지 않는 조용한 화법으로 표현한다.      


말과 행동은 최소화되어 있다. 대신 느리지만 단호한 기운과 눈빛이 팔다리가 묶인 현실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있고자 하는 가경의 욕망을 담아낸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전혜진의 표정들이다. 상대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 빠르게 짓고 사라지는 미소나 아득한 어느 때를 떠올리는 듯한 눈빛은 시청자로 하여금 인물이 취하는 비윤리적인 행동 너머의 감정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송가경을 연민과 증오라는 단순한 감정에서 빠져나와 판단이 불가능한 인물로 만든다. 특히 전혜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촘촘해진 가경을 통해 진창 속에서도 고요하게 존엄을 지키는 법을 보여준다. 이혼과 유니콘 대표 승진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반격 역시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며, 더 이상 뜨거움으로만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어른의 고민과 선택을 그린다. 나이와 직장 내 위치, 결혼의 유무 등 다양한 정체성이 담긴 드라마 속 이야기가 여성 시청자들의 사고를 확장하고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도 물론이다.      


전혜진은 1998년 데뷔 후 극단 차이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차이무의 연극들은 주인공을 특정하기 어렵다. 작품은 공중화장실(<비언소>)과 집(<양덕원 이야기>), 술집(<거기>)이라는 장소를 오가는 인물을 그려낸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지만, 상대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이야기가 더 많은 연극. 이런 작품에서 한 팀으로 이뤄내는 호흡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앙상블이 배우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한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차이무는 아티스트로서 배우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혜진은 라이선스보다는 창작을, 극적인 감정의 표현보다는 자연스러움을, 강압적이기보다는 유연한 극단에서 부대끼며 작품 안에 자연스레 존재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입체적이라면, 무엇이든 스스로 헤쳐 나가길 원하는 성격과 차이무식 표현법이 결합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제 본연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를 가두는 것들을 부숴나가고,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려고 노력해요.”(<중앙일보>) 전혜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한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의 아내, 어떤 배우의 파트너가 아닌, ‘배우 전혜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다짐의 결과가 2015년부터 분량과 상관없이 또렷한 인상을 남긴 영상 속 캐릭터들이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가경 역시 “넌 왜 자아가 있니?”라는 무례한 질문을 부수며 걷는다. 그 어떤 로맨스보다도 더 흥미로운 가경의 걸음을 응원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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