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키는 159cm다. 높은 굽의 신발도 잘 신지 않아서, 계단에 오르거나 버스를 타지 않는 이상 165cm 너머의 세상을 알기가 어렵다. 낮은 눈높이도 마찬가지다. 의자에 앉거나 눕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다. 집 밖에서는 누울 일이 없으니 더욱 모른다. 서있는 곳이 달라지면 펼쳐진 풍경도 달라진다,라고 했다. 그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서있는 곳이 ‘높아진다’만 생각했다. ‘낮아진다’는 선택지는 아예 만들어두지도 않은 삶. (인간이 이렇게 오만하다)
조카와 놀면서도 눈높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눈을 맞춘다’에 불과했고, 대체로 나와 조카의 만남은 언제나 늘 몇 시간의 이벤트일 뿐이니 당연했다. 그러다 30cm 눈높이의 생명과 함께 살게 됐다. 일상 구석구석에 그 존재가 있다 보니 모든 게 달리 보였다.
산초와 나는 망원동에 산다. 걸어서 3분 거리에 한강 공원이 있고,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도 좋은 곳이다. 산책하는 강아지도, 길고양이를 위한 급식소도 쉽게 만난다. 반려 동물과 함께 갈 수 있는 카페도, 용품점도 많다. 그런데 쓰레기도 많다. 입양 초, 산초가 6개월이라 나는 산책에 나갈 때마다 “뱉어”를 달고 살았다. 뭐든지 입에 넣어보고 스스로 판단해야 직성이 풀릴 때였다. 길에는 닭뼈와 갈비뼈, 순대는 물론이고, 동물 사체도 생각보다 많았다.
더 큰 문제는 봄과 함께 찾아왔다. 유동인구가 많아지며 쓰레기의 양과 종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바닥을 뒹구는 테이크아웃 컵에서는 음료가 흐르고, 담배꽁초는 수북했다. 각종 비닐과 빨대, 부러진 나무젓가락도 많았다. 겨울을 보내며 산초는 쑥쑥 자라 길에 떨어진 것들에 관심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과자와 동물뼈, 버려진 휴지는 귀신 같이 찾아냈다. 월요일 망원유수지로의 산책은 포기한다. 바닥에 떨어진 피자와 치킨 부스러기, 소세지 포장지와 과자가 <헨젤과 그레텔>을 연상케 한다. 거리에 쓰레기통이 정말 없구나 싶기도 하지만, 버릴 곳이 없다고 노상에 버리는 건 말이 되는가.
인류애가 바스러지면 산초가 멈춘 곳을 바라본다. 30cm에서 보는 세상은 무엇일까. 새순이 나고 있다. 민들레와 이름 모를 들꽃으로 가득하다. 탐스런 벚꽃과 장미에 눈을 빼앗기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어릴 때는 토끼풀꽃으로 반지도 곧잘 만들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흔하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것도 같다. 꽃보다는 잎을 중점적으로 공략하는 편이라, 올해는 연둣빛 잎을 많이 바라봤다. 보드랍고 약하고 싱그러운 존재.
여전히 사체를 보면 놀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 산초가 뭔가를 먹고 있으면 불안하고, 길에 떨어진 초콜릿 포장지를 보면 화도 난다. 그런데 30cm가 보여주는 좀 더 소중한 것들에 집중하고 싶다. 예전의 나라면 쉽게 보지 못하고, 어쩌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들이라서다. 그게 더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화내며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