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여기 개 갖고 오면 안 돼요.“
어제 산초와 체육공원으로 산책을 갔다가 어떤 아저씨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여기 강아지 출입 안 되는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나?’였다. (강아지들 잘만 다니는 곳이었음)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잘못했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런데 그 자리를 빠져나와서도 꽤 길게 불쾌한 감정이 들길래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무엇에 버튼이 눌린 걸까.
모든 단어가 나를 자극했다. 아줌마, 개, 갖고 오면, 안 돼요. 마흔은 넘었으나 ‘아줌마’라는 호칭에는 아직 면역이 없었다. 산초가 개는 개인데 어쩐지 그 ‘개’라는 단어는 별로였다. ‘갖고 오면’의 대상은 물건이었고, ‘안 돼요’는 부정어였다. 틀린 단어는 아니지만, 다 싫었다. 결국은 태도와 뉘앙스 문제다. ‘아줌마’에 담긴 윽박지름, ‘개’와 ‘갖고 오면’에 담긴 동물 멸시, ‘안 돼요’에 담긴 거절. 그 순간 나와 산초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고, 부정적인 문장으로 주변의 시선을 끄는 게 싫었다. (실제로는 당시에 우리를 바라본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부정적인 방법으로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나는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잘못도 안 했으면서 왜 늘 주눅이 드는 걸까. 매사에 대체로 그랬다.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 많고 그걸 미덕이라 믿고 살았다. 친구들과 ‘하녀병’이라고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기도 했지만 실제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강아지를 키우고서는 그런 태도가 더 강화된 것도 같았다. 나는 좋지만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으니 내가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 아빠와 함께 귀촌한 엄마는 얼마 전 동네에서 풀어놓고 키운 개가 사람을 물었다며 나에게 파상풍 주사를 맞으라고 했었다. 그 일이 벌어진 후에는 산초를 예뻐하면서도 줄을 짧게 잡고 다니라거나 조심하라는 말을 종종 했다. 왜 동물이 있는 쪽이 더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나를 걱정해서라는 것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알지만, 어쩐지 속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나는 언제나 양가감정 속에서 혼란스럽다. ‘왜 이런 말을 들어야지?’와 ‘조심해야 되는 게 맞지’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나의 이런 태도가 산초를 가두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늘 내가 있어야 산초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그냥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받아치진 못해도 상처는 받지 않는 사람이, 문장에 담긴
의도를 다 파악하려는 시도 대신 ‘그러려니’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 나의 바닥을 보아도 자책하지 않는 사람이, 그럼에도 곁에 있는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