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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an 17. 2024

더께, 하찮은 것들의 하찮지 않음

엄마의 정기 검사 보호자로 대형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병원 안은 연말연시 백화점이나 상점가같이 사람들로 버글버글했다. 이곳에서는 마스크도 여전히 착용해야 입장이 가능했다. 겨울철 두꺼운 외투와 광활한 병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 거기에 안 쓰던 마스크로 입과 코를 덮었더니 병원에 오면 열이 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더해졌다. 세 가지 검사를 하고 난 후 2시간 동안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가 진료까지 봐야 병원을 떠날 수 있다. 반나절 넘게 이 복닥거리는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다.


1층에서 검사 하나를 마치고 2층으로 이동하여 두 가지 검사를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5분 정도였나? 그런데 검사실을 찾아가는 데는 그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병원은 넓고 가고자 하는 장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오랜 병원 경험이 많은 엄마가 검사실의 위치를 대략 파악하고 있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검사실과 진료실 앞 대기실은 이동 침상과 휠체어, 사람들로 가장 붐비고 있었고 의자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자세히 살펴보니 혼잡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어디서나 사람 대신 서 있는 키오스크. 접수증 바코드를 인식시키고 진료(검사) 순서를 기다리는 시스템은 창구에 앉은 사람보다 더 빨리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동네병원만 다녀본 사람에겐 모든 절차가 꽤 복잡하고 생소한 곳이 대형 병원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정기 검사를 위한 환자, 휠체어나 침상에 누워 검사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뒤엉킨 대기실에는 환자 수만큼의 보호자들이 진료표를 펄럭이며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곁에 1+1 상품처럼 한 명씩 붙어있는 보호자까지 더해지니 병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일 수밖에. 겨우 찾은 빈 의자에 멍하니 앉아 한숨 돌리고 있자니 시장통같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대기실에서도 얼핏 대화가 들려온다. 젊은 자식과 늙은 부모의 아주 일상적인, 몇천 번은 오갔을 대화가.


밥은 먹고 왔냐?

엄마는 드셨어?

아침 일찍 먹고 출발했지.

나도 먹었지, 좀 어때?

난 아주 좋아졌어......


고개를 들어 대화의 주인공을 쳐다보니 희끗희끗한 백발로 머리가 반 이상 뒤덮인 조금 덜 늙은 사람이 접수 서류를 쥐고 서 있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숱이 적은 백발노인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늦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직은 꼿꼿한 반백 발 중년을 보자니 어딘가 아주 낯익은 느낌이었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한 조를 이룬 우리 모녀는 검사를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하고 커피까지 마시니 진료 시간이 되었고 반년 치의 약을 받아서 엄마는 집으로 황급히 돌아가셨다. 드디어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져버리는 병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반년마다 방문하는 병원은 언제 가도 초행인 듯 길을 헤매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나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아픈 사람들에 놀란다. 정기 검진, 약 처방과 같은 가벼운 말에서부터 수술, 입원, 재수술 같은 심각한 말들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짐짓 어깨가 위로 솟으며 굳는다.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기만 하자를 반복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손을 조금 더 깨끗이 닦는다.


병원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초췌하게 늙은 모습으로 접수에서 진찰까지 보호자의 손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고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슬며시 떠올랐다. 그러다 고개를 홰홰 저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를 지우려 애썼다. 그들의 보호를 자처하며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도 역시 누렇게 뜨거나 창백하게 늙어가기는 마찬가지였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자신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들이 눈에 들어온 건, 그들의 노쇠함에 마음이 쓰이는 건 이유가 있었다. 그 속에 자신이 고스란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일요일, 집에만 있으면 후회할 거라며 찾아간 미술관에서는 조각전이 한창이었다. 조각은 너무 어렵다는 편견을 깨듯이 친절한 해설이 작품의 이해를 도왔고 한 시간 정도면 꼼꼼히 둘러볼 정도의 전시 규모가 부담을 덜어주었다. 영원히 초심자일 것 같은 우리에게 딱 적당한 전시였다.


더께:일의 흔적, 이는 곧 기억, 역사, 서사, 개인의 목소리가 모여 만들어 낸 하나의 집합체이자 일종의 '덩어리진 시간'이 되어 쌓인다. 각각의 재료에서 발견되는 파임, 상처와 같은 흔적을 "겪음이 살아있다"라고 작가는 보았다.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말로 ‘더께’를 표현하였다. 작품설명을 보는 순간(작품만 봐서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병원에서 직면했던 깊은 주름과 구부정함도 파임과 상처와 같이 겪음이 살아있는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목, 폐자재, 고철 등 목적을 다하고 버려진 재료들, 하찮거나 쓸모를 다한, 그러나 시간과 경험의 결이 응축된 재료에 주목하여 폐기를 앞둔 재료들에 각자의 역할을 부여해 왔다. (…) 하찮은 것들의 하찮지 않음'을 향하는 오랜 관찰자, 정현 작가의 그러한 고민이 이번 전시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날의 전시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병원에서의 반나절을 떠올리며 시원해지는, 뭔가 풀리는 느낌이 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하찮거나 쓸모를 다했다고 평가되는 것에 스스로가 편입되는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현실을 자각하는 동시에 그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건강해지자, 건강하면 쓸모없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것처럼 눙쳤던 자신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와 동시에 겪음의 시간이 만든 상처와 파임이 하찮은 존재라는 낙인은 아니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 것은 아니었을지. 잘 알지 못하는 거친 덩어리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날이었다.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249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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