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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an 03. 2024

여행의 의미

모든 것을 포함하지는 않는 패키지


대망의 호주 여행을 예약했다. 여행출발을 겨우 열흘 남긴 시점이라 거의 마감 직전이어서 계약금을 걸고 항공기와 숙소의 잔여석을 조회해봐야 했다. 몇 시간 뒤 겨우 좌석을 확보했다는 연락을 받고 여느 때와 달리 망설이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행비용을 결제했다. 스스로의 과감한 결정을 대견스러워했다. 비자발급이라는 관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지만 왠지 그날은 모든 일이 잘될 거라는 낙관으로 가득했다.


줄곧 북반구에서 살아온 인간이 최초로 방문하는 남반구의 나라 호주, 뉴스에서만 보던 섬머 크리스마스를 상상하며 여행가방을 꺼내 펼쳤다. 항상 남들보다 적은 짐을 들고 여행을 떠나던 우리는 캐리어를 두 개나 꺼내놓고 평소와는 다르게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열이틀짜리 여행 때보다 옷도 신발도 욕심껏 많이 채워 넣어 처음으로 커다란 캐리어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우산과 우의도 챙겨야 했다……


사실은 여행 내내 비가 올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예약할 때는 무조건 쨍한 여름날씨를, 엄동설한을 녹여줄 따듯함만을 떠올리며 일정 중 끼어있던 우산에 빗물 그림을 애써 외면했다. 날씨는 점차 바뀌는 거니깐, 설마 비행기에 앉아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겨우 4일밖에 되지 않는 일정 중에 비가 오겠냐며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그래도 출발 전까지 일기예보를 찾아보며 쉽사리 변하지 않는 예보에 조금은 실망하면서 우의와 우산을 가방 한구석에 넣어야 했다.


여행 세 번째 날 모래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일정이 잡히자 미리 예보를 접한 동행들은 가이드에게 반복적으로 문의했다. 비바람, 모래, 썰매의 조합을 심히 우려하던 일행들에게 가이드는 비소식은 없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듯 말했다. 걱정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듯 마이크를 들고 공표했다. 포트스테판으로 3시간이나 이동하는데 비는 오지 않는다고. 꽝꽝!!


당일 아침에는 파란색 천 시트가 현란한 노후차량이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보대로 전날 밤부터 비바람소리가 얇은 호텔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적잖이 불안했으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이동을 한다니깐 믿어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베테랑 가이드가 참고하는 일기예보가 더 정확하리라 생각하고 싶었다. 호주의 여름날씨에 맞게 한여름 복장으로 투어에 나선 사람들과 달리 비바람을 막아줄 옷을 제대로 입은 가이드의 착장에 조금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3시간을 달려간 포트스테판. 아무리 빠른 속도로 오래 달려도 비는 피할 수 없을 것같이 줄곧 많이도 내렸다. 바람에 우산은 뒤집어지고 모래언덕으로 접근하기 위해 탄 이동버스 좌석은 젖은 모래로 가득해서 살갗을 파고들었다. 비를 가려주는 작은 천막에 머리만 옹기종기 맞대고 60도 경사의 모래언덕을 바라보았다. 과연 썰매를 탈 수 있을까? 어린 친구들이 먼저 맨발로 검은 보드를 들며 나섰다. 그들은 비바람에 저항하며 언덕을 향해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시원하게 모래언덕을 타고 한 번에 내려온 행운아도 있었지만 언덕 중턱이 비에 젖는 바람에 보드가 움푹 파인 곳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악천후에 모래언덕을 찾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단체관광객 세 팀뿐이었다. 그날 다른 팀 관광객들도 언제 여기를 또 오겠냐는 심정으로 모래썰매 타기를 감행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꽤 많은 사람이 썰매 타기를 시도했고 흠뻑 젖어 내려왔다. 왜소한 비가림 천막에 서서 대책 없이 관광을 진행시키던 가이드들은 오히려 이런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말을 보태가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천막 안에서 비를 긋고 있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일정을 모두 소화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날은 관광지 관리자인 현지인들도 오돌돌 떨며 그 자리를 겨우 지키는 험악한 일기였다.


시드니로 돌아오는 길에도 비바람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급기야 노후차량의 지붕을 타고 비가 똑똑 들어오기 시작했다. 뿌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 물기를 없애기 위해 에어컨은 최대로 가동되어 차 안은 머리가 쭈뼛거릴 정도로 썰렁해졌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모래구덩이에 박히는 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던 용자들은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상태로 3시간을 견뎠다. 여기저기서 작은 아우성이 터졌지만 크게 도발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낸 일행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실질적인 여행의 마지막 날, 일행 중에 딸 둘과 함께 온 중년의 여성은 록스거리에 버스가 정차하자 딸의 손을 잡고 주저 없이 펍으로 향했다. 그들의 꽁무리를 눈으로 좇으면서도 삐사감은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40분 정도 자유시간 드릴게요. 화장실 다녀오시고 거리 한번 둘러보시고, 혹시 커피나 맥주 한잔 하셔도 좋겠지만 연휴 시작일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 주문하면 아마 엄청 늦게 나올 거예요. 각오하시고….. 약간의 저주 같은 마지막 말에 남반구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축제에 살짝 동승하려던 마음을 접고 거리만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바쁜 걸음사이에도 느껴지는 크리스마스 연휴의 흥분과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계속 눈길이 갔다.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아끼던 가이드 덕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다. 완전히 뒷북치는 일이었지만 여행기간 동안 둘러보았던 여행지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나 원주민과 식민지개척(수탈)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럽보다는 너무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주하기 시작한 록스거리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장소였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사진만 찍을 일이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록스박물관에 들러 나중에 읽어보겠다며 안내문만을 챙기면서 서둘러야 했던 순간이, 박물관 관계자가 반가운 웃음으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으며 좋은 관람이 되라고 말했지만 여유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버스에 올라탔던 그때가 새삼 아쉬웠다.


그렇게 마지막 시내일정을 패키지스럽게 마치고 나서 선상에서 엄청난 양의 흰살생선이 주식으로 나오는 점심을 먹었다. 거의 30명이나 되는 단체가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여행에 실망하고 낙담하면서 식사시간마다 한 테이블에 앉게 되는 일행과 꽤 많은 이야기(=험담)를 나누었다. 여행에서 좋았던 점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문제점을 얘기하다 보니 정말로 잘못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록스거리에서 펍에 입장했던 가족과 합석하게 되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을 꺼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산미 있는 커피 한잔, 펍에서 마신 맥주 한잔, 그걸로 좋은 여행이 되었어요.


그들은 록스거리에 있을지도 모르는 구경거리를 과감히 버리고 펍에서의 맥주 한잔을 선택했다고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으로써 빗물에 질척해진 모래언덕 썰매의 기억도, 잰걸음으로 가이드를 쫓아다니기 바빴던 모든 일정의 긴박함도 어렴풋이 잊을 수 있었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사실 이 여행이 진행되던 어느 시점부턴가 기대는 지우고 불만과 불신만 키워가고 있었다. 가이드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 흘리며 속으로 비아냥거렸고 여행지를 너무 성급히 선택한 자신을 원망했다. 게다가 마감직전에 예약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계약한 것도 알게 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과감성이 화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패키지여행은 이제 정말 그만하자, 호주는 다시는 안 올 것 같아, 이 항공사는 겨우 연명할 정도만 밥을 주는구나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넋두리. 그러다가 끝도 없이 떠오르던 불만 섞인 생각들이 일상에서도 항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커피나 맥주 한 잔으로 안 좋은 상황, 의외의 현실을 이겨내는 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는 없던 것이 아니었을까.




패키지여행 특성상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사진스폿에 가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긴 이동 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화장실은 습관적으로 가주고 단체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시간은 엄수해야 한다. 이런 여행도 반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 익숙해진다. 적응해 버린다. 여행의 목적이 되어버린 인증사진 찍기와 화장실 가는 일이 30분 내외의 자유시간만으로도 넉넉해지는 매직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가이드보다도 먼저 대형버스 안에 착석하고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너무나도 잘 알면서 선택한 여행이었다. 여행의 고수처럼 항상 현재를 즐기지 못했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에라도 꿰어놓은 곶감을 하나씩 꺼내먹듯이 기억해 보기로 했다.


삐사감은 신비한 꽃과 나무에 열광했다. 뒷걸음으로 나무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코알라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칼립투스 전신주를 실컷 볼 수 있었다. 남반구의 낮에 나온 달이 반가웠다. 흰 살 생선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맛난 호주 맥주를 발견했다. 나무도 사람도 영토도 거대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느긋해서 우리와 사뭇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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