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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Nov 09. 2023

세 사람 이야기(1)

몇 개월 만에 제주에 다시 왔다. 운 좋게 일 년에 두 번이나 오게 되었지만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머뭇거리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제주의 특이한 자연경관 탐방, 전시회 가기, 작은 동네 산책이 일정의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방주교회 한 바퀴 돌기라는 이상한 공식으로 움직였는데 일행 모두가 좋아하는 코스는 아니었다. 식사는 최대한 간단히, 붐비거나 기다려야 하는 식당은 무조건 패스, 시끄럽고 사람 많은 풍경 근사한 카페는 피하고 차라리 싸구려 커피를 사들고 나와 바람 부는 바다를 바라보거나 길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다분히 삐사감의 취향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선인장이 다른 제안을 해왔다.


공항 근처에 있는 유명한 해장국집에 가려고 네비에 주소를 찍었다. 대기표를 받으러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가게 주인은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던지고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작은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보다 밖에서 대기표를 들고 골목을 메운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주차하기 전에 얼핏 보였던 몇몇의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던 것이다. 차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행렬에 기가 질린 일행과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번엔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쩝.


아주 뜨겁게 알려진 식당 옆에는 그 어디보다 한산하고 조용한 식당이 있는 법. 해장국집 주변에서 어렵사리 발견한 순두부식당에서는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순두부와 돌솥밥을 단돈 9천 원에 먹을 수 있었다. 삐사감은 가성비 좋은 식당이라고 생각했고 나무는 순두부에서 김치찌개맛이 나서 대체로 만족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해장국을 놓친 선인장에게는 세상 맛대가리 없는 순두부였다.


비가 온다 하니 전시회-서점-또 전시회-카페 겸 작은 전시장을 일정으로 잡은 첫날, 일기예보대로 흐리고 가끔 비가 내렸다. 그러다가 햇살 가득한 파란 하늘이 보여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갑자기 햇살 위로 비가 쏟아지고 이윽고 무지개가 떠버리는…. 괴이한 날씨였다. 그래도 무지개를 보는 행운을 얻었으니 삐사감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맛대가리 하나 없는 순두부로 배를 채우고 미술관을 가려는데 갑자기 삐사감이 입장권이 너무 비싸지 않냐며 산통깨는 소리를 했다.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선인장은 미술관에 들어가는 대신 동네 산책을 선택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콜라와 옥수수차를 사들고 잠시 쉬는데 동네 고양이가 찾아와 꼬리로 다리를 감는다. 검은 고양이와 함께 몸도 마음도 잠시 쉬었다.


삐사감이 괜한 말로 선인장의 화를 돋우어 삐사감과 둘이서만 작품을 감상하는 이상하고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제주 풍경을 주로 그려나간 화가의 그림을 벽면 가득 아끼지 않고 전시한 공간을 보는 순간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노출 콘크리트의 투박한 건물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한 비를 든든히 막아주었고 관람객이 없는 넓은 공간을 독점하며 자유롭게 그림에 대한 인상을 나눌 수 있었다. 확실히 미술관 입장료는 비싸긴 했지만….


제주에는 작은 독립서점이 많다. 온라인 서점에서 주로 책을 사거나 밀*의 서재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오프라인 책방은 서가를 채우고 있는 책에서 주인장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지역마다 색다른 잡지(무가지)를 얻는 것도 책방을 들러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 들러 본 책방 앞에는 최초로 덕질한 그분을 기리는 비석이 있어 반가웠다.

미술관을 독점하는 신비한 체험, 삐사감의 최애는 평안하다!


국공립 미술관 전시는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적어도 한 작품은 남긴다. 이번 제주도립미술관 전시에서는 <아키 이노마타, 소라게에게 쉼터를 제공한다면>라는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좋은 껍데기를 위해 경쟁하는 소라게가 인간처럼 느껴져서….

집게과 동물은 스스로 갑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고둥이나 소라의 껍데기를 빼앗거나 주워서 자신을 보호한다. 작가는 몸이 성장할 때마다 적당한 크기의 집을 찾아 이사해야 하는 소라게에게 세계 각국의 도시를 본뜬 레진 껍데기를 선물한다. 주로 지역을 상징하는 건축 이미지로 제작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관덕정'을 모델로 삼았다. 소라게는 질 좋은 껍데기를 위해 서로 경쟁하지만, 이러한 집착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권유한다.


삼인삼색, 각자 끌리는 작품으로 고고!


담화헌 옹기전시장에 도착하니 하늘이 파랗다. 비가 그치고 더 맑게 갠 하늘에 새삼 감탄했고 다양하고 독자적인 옹기와 정원을 가득 메운 이름 모를 제주식물을 보면서 절로 들떴다. 제주 흙으로 빚은 옹기를 전시하면서 한편에 카페를 겸하고 있는 공간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딱 좋았다. 일행이 주문한 청귤차, 댕유자차는 달지 않게 상큼했고 커피맛을 잘 모르는 삐사감은 캡슐커피만으로도 만족했다. 낯선 음악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잔잔히 흘러나왔고 나무, 흙으로만 만들어진 공간 특유의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약간의 옥신각신도 함께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음을 말랑하고 부드럽게 하는 시간
안개에 휩싸여도 언젠가는 보게 될 맑은 하늘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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