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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Aug 31. 2023

마지막 인사

아직은 두렵기만 하다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까지 집이 아닌 장례식장에 가서 조문한 적이 거의 없어서 입고 갈 변변한 옷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머뭇거리면서 대충 검은 계열의 밋밋한 옷을 챙겨 입고 나섰다. 돌아가신 어르신은 사진 속에서 평안한 얼굴이었는데  영정 옆에 보이던 ‘국가유공자’라는 글자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이라… 어떤 삶을 살아간 사람일까? 괜히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가 주는 어색함을 억지로 견뎌보려고 했다.


  여럿이 함께 영정 앞에서 절하고 상주와 인사하고, 마땅한 위로의 말을 건넨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음식이 놓인 상에 앉았다. 이보다 빠른 진행이 있을까 싶은 조문절차를 멍한 상태로 거쳤다. 누군가 음식 칭찬을 했고 의외로 맛나게 식사를 하면서 근황을 주고받다가 목소리가 커지고 급기야 웃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말하면서 울컥,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또 한 번 울컥하면서도 상주는 평정을 잘 찾아갔다. 황망한 얼굴이었지만 손님을 열심히 대접하고 음식을 권하고 음식이 맛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엄숙해야 하나, 말수를 줄여야 하나…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망자의 부인은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고 왔다며 눈물을 훔치면서도 조문을 와준 우리에게 또다시 고마움을 전했다.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보내면서 저런 애틋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다행이지 싶었다. 우리 일행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족의 아쉬움과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든을 훨씬 넘긴 망자의 죽음을 두고 호상이라고 떠들어댔다. 앞뒤 열을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이어가느라 높아진 목소리와,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한 차 소음이 더해져서 차 안은 폭발할 것 같았다. 나도 동참하느라 목은 갈라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죽음, 그것이 주는 느낌이 아득하고 저릿하기만 할 뿐 확실한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언젠가 상주 자리를 지킬 나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그 누구도 청하지 않는 조용하고 쓸쓸한 장례식을 꿈꾸었다. 망자를 보내는 의식에 타인의 목소리나 웃음, 잡설이 섞이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아까 우리처럼 조문객 누군가는 내 슬픔과 애도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을 잘 보내는 의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혼란해졌다. 그런 생각과 함께 과거 집에서 치른 거추장스럽고 고된 장례식도 떠올랐다. 그 어떤 것도 정답으로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어려서 돌아가신 조부모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의 장례의식은 집에서 치러졌다. 그들의 장례식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문드문 기억에 남아있다. 큰집 앞마당에 하얀 천막을 치고 몇 날 며칠 음식을 장만해서 손님을 받고 밤새 술을 마시며 철야를 했다. 큰아버지를 대신해 상주 역할을 하던 아빠는 술에 많이 취해서 엄마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먹을 것을 넘치게 장만하여 대접하느라 여자들이 곤죽이 되어갈 즈음, 가족 모두 차에 타고 장지로 향했고 동네사람들은 상여를 가족묘지까지 들고 올라왔다. 작은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나는 하관의식을 보면 액운이 드는 출생 연도에 해당되었던 탓에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하관 후에는 장정들이 봉분 가운데에 막대기를 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돌면서 봉분을 다졌다. 그동안 남은 가족은 고인의 옷가지나 소지품 등을 태우면서 또 한차례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 나면 얼추 의식이 끝났다.


    백수에 가까운 96세에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술과 고기를 입에 달고 살면서 항상 위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죽기 전 몇 년 동안은 치매에 걸려서 근엄하던 모습은 갓난아기로 변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며느리가 대신해야만 했다. 자식이 열명이나 있었지만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 모두 며느리의 몫이었다. 젊어서는 무서운 호랑이 같던 할아버지는 어리광 부리는 고양이처럼 무력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끝없이 일을 만들어냈다. 처음과 끝의 극명한 모습을 모두 기억하는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미워했던 작은 아빠의 죽음에도, 무섭게 호령만 치고 한 번도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죽음에도 나는 마냥 눈물이 나왔다. 생전에 품었던 감정은 깡그리 잊고 그들의 죽음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말았다. 주변의 슬픔이 전이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이었나? 드라마나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심지어 뉴스를 보다가도 심히 억울하고 답답한 장면을 목도할 때면 눈물샘이 터지는 나에게 그들의 죽음이 정말 목놓아 울 정도의 일이었는지 의아하지만 나는 많이도 울었다.


  당시 장례의식이 고인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상을 당한 가족이 슬픔을 충분히 토로할 수 있도록 가까운 친족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의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내가 머리가 저릿하도록 울었던 것도 의식에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례의식이 나와 돌아가버린 그 사이에 축적된 많은 기억과 그 안에 있던 감정을 반추하는 시간이라면 아직은 충분히 추모할 대상을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하기엔 그날이 엄청난 숙제처럼 남아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례식장에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직은 그 의식이 두렵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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