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번역 일지를 참 열심히 썼다. 번역하다 중간중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 '번역'이라는 물속을 유영하다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숨 돌릴 때, 그럴 때마다 일지를 썼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그저 업무 일지에 가까운 글이었다. 그래도 그 글 덕에 지난 시간 내가 어떻게 일해왔는지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일지와 일지 사이에 틈이 길어지게 된 건, '일지 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번역하자...'라는 생각이 커지고부터였다. 육아와 병행하는 일상은 매우 바쁘고 정신없어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틈새 번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블로그 기록은 자연스럽게 후순위로 밀려난다. 그래도 틈에 또 틈을 내어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일을 하며 찰나를 스쳐가는 상념들이 자주 빠르게 휘발되어 버려서다. 나이가 들수록 자주 기록하고 메모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요즘 일하는 순간순간마다 자주 머리를 스치던 생각이 있어 기록해 보려고 한다.
예전에는 누군가 '번역을 잘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나의 가장 1순위 대답은 '모국어 실력'이었다. 말하자면 모국어 표현력, 원문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모국어 능력. 나는 그 모국어 표현력을 키우고 싶어 책을 자주 손에 쥐었고, 저자가 쓰는 단어를 특히 유심히 살피다가 인상 깊은 표현이 보이면 노트든 휴대폰 메모장이든 서둘러 펼쳐서 적어두었다.
그런데 최근 나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니, 모국어 표현력이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닫고 있다. 그건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심리와 감정에 대한 디테일한 이해. 적확한 모국어 표현을 찾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지금 이 인물이 이 상황에 가졌을 심리와 감정을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저자가 이 단어를 활용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그에 맞는 모국어를 취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표현을 쓸까'에 들이는 시간보다 '이건 어떤 심리일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심리와 감정을 정확하게 캐치하는 순간, 그에 맞는 표현을 찾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모국어 표현력을 기르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심리와 감정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심리와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룬 비문학 도서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소설이 제일일 것이다. 수많은 인물 속에 나를 투영해 볼 수 있는 경험, 나와 전혀 다른 인물을 가까이서 농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경험은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새로운 깨달음 이후, 번역하는 시간의 색채가 질적으로 달라졌다. 언어 싸움에서 조금 더 깊게 나아간 느낌이다.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그 마음 상태에 들어가 미리 체험해 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 몰랐다. 그래서일까. 안 그래도 번역을 사랑하던 나는 번역하는 이 순간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