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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Apr 03. 2023

애도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외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는 왜 '엄마'인 상태로 외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가.



할머니가 숨을 거두셨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현충원에 할머니를 묻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한 모든 결정이, 의지할 이가 오직 부모뿐인 어린아이와 함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으나. 외할머니의 손녀, 엄마의 딸로서의 최선은 아니었으므로. 내 자식 하나 건사하기 벅차서 손녀된 도리도, 자식된 도리도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엄마가 점심시간 즈음 전화를 해왔다. 낮은 목소리였다. 오늘 외할머니를 보고 왔는데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 했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막 넘어 다시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 돌아가셨다." 말을 마치자마자 엉엉 울었다, 엄마가.




이때부터 뇌가 멈췄던 것 같다. 전화로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는지, 미리 예견했던 일이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였는지, 당장 엄마 껌딱지인 아이를 데리고 언제 어떻게 부산으로 내려가야 할지 계산하느라 과부하가 왔었는지, 혹은 그 셋이 모두 공존했는지. 말 그대로 뇌가 멈춰서 돌아가지 않았다. 상을 당한 당사자인 내가 빨리 생각하고 결정해서 움직여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하려고 해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창 유치원 적응하느라 종일 울고 주말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만큼 예민해져있던 아이를, 유치원을 장기 결석시키면서, 처음 타는 비행기와 기차를 이용해 장례식장에 가서. 또한 바쁘고 정신없고 슬프고 피로한 장례 기간을 아이의 눈치를 보며 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엄마를 잃은 엄마의 슬픔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앞에 스스로 감정 불구가 되기로 선택했는지. 이상하리만치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한편으로는 외할머니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늘 답답해하셨던 병상에서 자유하실 수 있으며, 무엇보다 천국으로 가시기에 할머니 만을 생각하면 슬픈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할머니를 위해 기뻐할 일이지. 그치만 한동안 이런 생각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저 신체적인 고통 - 무얼 먹어도 느껴지는 구내염의 고통과, 목과 어깨에 난 통증 - 과 아이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온전히 그 슬픔에 함께 머물 수 없음은 나를 더욱 짓눌렀다. 장례식을 마치고 KTX, 공항철도, 택시를 연이어 타고 집에 도착했다. 당장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엄마는 부서질 자격이 없다. 아이 의견대로 짜장면을 시켜 나눠먹고, 피곤해서 짜증나지만 막상 잠들기 싫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 이른 저녁에 재웠다. 곧바로 나도, 남편도 쓰러져 잠들었다. 아직 우리에겐 쉴 수 없는 주말이 남아있었다.






남편과 유튜브가 육아의 일부분을 나눠 맡았으나 나에게 할머니를 애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틈만 나면 침대에 누워 충전한 뒤, 다시 육아를 해야 했으므로. 할머니를, 그리고 엄마를 다시 떠올린 건, 장례식이 다 끝나고 맞이한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밤이 되어서였다.



가족 단체 카톡방에 할머니와 찍은 사진들을 추려 공유했다. '새별이가 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지난 설날'.




그래, 설날. 불과 3주 전까지 친정에서 겨울방학을 보냈기에 이번 설엔 가지 말자는 얘길 했었다. 설연휴 첫날, 안 내려갈 것 같다던 말에 따라온 엄마의 서운함 잔뜩 묻은 목소리가 나를, 우리 가족을 갑작스럽게 다시 통영으로 향하게 했는데. 그때 내려가지 않아서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면, 나는 나를 분명 원망했을테다. 설에 본 두 사람이 불과 두 달 만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테고, 같이 가지 말자고 한 남편을 원망했을텐데. 원망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시 단톡방. 할머니와의 추억을 올리니 엄마가 슬픈 마음을 털어놓았다. 증손주를 '꽃'이라고 부르셨던 할머니는 전화를 하면 가장 먼저 증손주의 안부를 물으셨다고, 첫 손주라서 첫사랑인 나를 많이 아끼셨다고. 더 이상 엄마를 찾아갈 수도, 부를 수도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갑자기 쓰나미처럼 슬픔이 몰아쳤다. 몇 년 전부터 할머니는 떠나는 우리를 보면 아쉬워서 우시곤 했다.




장례식 내내 안겨있으려고 해서 아이를 늘 안고 있었다. 목과 어깨의 통증이 등까지 내려왔고, 양팔엔 전에 없던 근육통이 생겼다. 사실 장례식장에서 엄마와도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아직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아이가 없어야, 오롯이 나 혼자여야, 이 슬픔이 무엇인지 겨우 알 수 있을까? 당장 엄마를 위로할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장례식을 치렀지만 아직 나는 할머니를 보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세상에 없으나, 나는 할머니를 보내지 못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어머님께도 자식이 있어서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때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때가 있었는지 어머니께 여쭤봐." 엄마에게 외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내일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집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겠다. '엄마도 우리 때문에 애도하지 못한 때가 있었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




지난 3월에 사둔 목정원의 두 번째 책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를 장례식이 끝나고 펼쳤다. 할머니와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부터 나의 애도를 시작하면 된다고, 책은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새별이가 외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그날 쓴 일기를 읽는다. 아이가 있는 엄마라서 서글프다고 생각했는데, 외할머니의 미소가 나 또한 웃게 했다.





2019년 11월 14일

"외할머니께 증손주를 안겨드렸다. 토끼처럼 귀엽다며 볼 때마다 웃으신다. 찍은 사진을 할머니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바꾸고 보여드리니, 계속 화면에 떠있는 거냐고, 보고 싶을 것 같았는데 하시며 좋아하신다. 꽃 중에 꽃은 인꽃(사람)이란 할머니 말씀 같이, 존재 자체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아기 새별. 가끔 아이를 낳은 게 너무 후회될 때, 이 사진을, 외할머니의 웃음을 꺼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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