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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30. 2021

이어 달리는 삶

뱅쇼를 만들었다. 사과와 오렌지, 레몬을 얇게 썰어 와인을 붓고 계피 스틱과 정향, 팔각을 함께 넣어 오래도록 끓였다. 보글보글 깊어가는 보라색 액체를 보며 문득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겨울 음료인 뱅쇼에 들어가는 과일은 사과 외엔 모두 제철이 아니다. 주황빛의 동그라미가 단단하게 윤이 나는 계절은 봄꽃이 예쁘게 피는 계절과 같다. 파인애플을 넣으면 향이 달라진다는 유튜브 선생님의 말씀을 꼼꼼히 메모했지만 한 통에 7천 원이 넘는 여름 과일 앞에서 그런 치밀함은 쓸모를 잃었다.


그래도 완성된 나의 첫 뱅쇼는 정말 좋았다. 과일이 가진 수분을 모조리 착즙하고 알코올은 완벽에 가깝도록 날려 만든 향신료 덩어리 액체, 그건 확실히 겨울의 맛이었다. 와인은 어떤 걸 사용해도 상관이 없었다. 기분 탓일 테지만 와인은 싸면 쌀수록 좋았다. 만 사천 원짜리 디아블로 보다 첫 글자도 기억 안 나는 육천오백 원짜리로 끓인 게 더 맛있었다.


시나몬 향으로 가득한 방에서  끓인 뱅쇼로 몸을 녹이고 있다 보니 겨울과도  뼘쯤 친해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런 생각을 했다. 오렌지가 가장 맛있는 계절에, 레몬  알을 2 원에   있는 계절에 뱅쇼를 끓였대도 같은 기분을 느낄  있었을까?

답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뱅쇼는  공기와 함께할  좋은 것이다. 재료가 최상급의 상태를 갖추지 않아도 충분히 완벽한 맛을 낸다. 태양의 기에 눌려 끈적한 숨소리만 오가는 공기 속에서 뜨거운 과일주는 결코 낭만일  없다.


쓸모란 무엇일까? 올해 들어 자주 곱씹었던 문장이다.  쓸모를 나조차도   없었던 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확신이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수치화할  없는 경험은 경험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의미와 쓸모를 어필하기 위해선 과정보다 명확한 결과를 가진 것들이  중요했다.

어떤 날에는 너의 포스팅을  봤다는 한마디에 새벽  시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이  기분이었다가도, ‘불합격 소식을 전하게 되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확인할 때면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사람처럼 울었다.


그렇게 유독 느릿하게 흐르는 봄과 여름, 가을을 보내다 뱅쇼를 만들었다. 어쩌면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싸구려 와인과  지난 과일들을  끓여 만든 보라색 음료는  가을밤에 제법 따끈한 위로가 되었다.


 맞는 시기가 있겠다. 나에게도.  지난 과일도 어쨌든 빛을 보는 마당에 10년이면 강산도 휘리릭 변하는 세상에서 이십  년을 살아내고 있는 나라고 어려울  없겠다. 가능성이나 재능은 수치화할  없으니까. 성실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다 보면 좋은 시기라는  오지 않을까. 인간이 코스모스나 제철 사과 같은  아닌  알면서도 그런 막연한 생각이 와르르 나를 덮쳤다.

갑자기  이러세요? 스스로 물을 새도 없이 그깟 음료  잔에 우스운 모양으로 소매를 적셨다.


그리고  밤의 싱겁고 유치한 결론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삶의 온도를  도쯤 올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유효기간도 제법 길다. 물론 음료 한잔으로 짓무른 마음이 아주 해결될 리는 없었다.

이후에도 나는 종종 비슷한 문제로 울었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어떤 날의 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런 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 다시 괜찮아졌으면 됐다는 말로 일상을 지킬  있는 삶은  버틸만하다. 어떤 날엔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머무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종일을 머무르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재시작을 돕는 장치도 결국 내 일상에 있다. 다시 일어나서 걷는 것, 그게 정말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내 삶에 ‘그래도’ 같은 부사가 자주 등장할수록 나는 확실히 단단해져 간다.


열여섯의 내가, 스무 살의 내가, 또 스물여섯 11월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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