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제목없는 여행기' 프롤로그
호주에 다녀왔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부산에 사는 K, 그러니까 나는 J와 호주 여행기를 함께 쓰기로 했고(어쨌거나 나도 그 운명의 토요타 안에 같이 있었으니까) 일단은 노트북을 사야했다. 노트북을 사는데 왜 두달이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설명하고 싶다.
시드니에 도착한 둘째 날, J와 나를 본다이 비치로 데려다준 Patrick이(우버 어플에 기록이 남아있다)했다는 그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뒤따라 내린 J가 상기된 얼굴로 전해준 그 말.
"들었어? 즐거운 추억 만들고 돌아가서 글로쓰래!"
어?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갑자기 우리한테 글을 쓰래? 한때 작가지망생이었다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한 Patrick이 지금은 소일거리로 우버기사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J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상상이니까. 20대를 꼬박 작가지망생으로 보냈던 나는 직장생활 8년만에 감성이 급격하게 퇴화했다. 과도한 의미부여나 원인 없는 결과를 참을 수 없게 되었고, 반면 시도때도 없이 우울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싶을 만큼 감정이 단순해졌다. 누군가 화나게 하면 화가났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좋았고, 아무일도 없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을 한 줄도 쓰지 않고도, 그래서 마음이 단단하고 정신이 건강해졌다고 느껴질때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본다이 비치에 우리를 데려다 준 우버기사 Patrick이 했다는 그 한 마디는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자꾸만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런 순간 있잖아요. 아, 인생이 바뀌고 있구나 느끼는 순간. 본다이 비치로 향하는 토요타 안에서 그걸 느꼈어요. 토요타를 타기 전과 내린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그렇게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그날은 잠들기 전까지 자꾸 이런 인터뷰를 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이것도 J에게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호주 여행기를 함께쓰자는 J의 제안을 덥썩 받았지만 본능적으로 자꾸 미루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 사이 J는 매주 성실하게 호주 여행기 매거진을 발행하고 있었고, 노트북을 사는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 매번 다른 이유를 둘러대는 데도 별다른 반론없이 기다려 주었다. 물론 호주에 사는 B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 J와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만나던 때도 있었고, 몇 년 동안 만나지 않고 지내던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연결되어 있었다. 호주에 사는 B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는데 매우 친한 사이였다,라고 주장하자 J가 그렇다면 B와 관련된 제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말해보라고 했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J와 몇년씩 만나지 않고 지내던 그때 우리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B와 고등학교때 친했던 느낌적인 느낌은 분명 남아있는데 에피소드는 왜 남아있지 않은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보조메모리로 쓰고 싶다며 날 곁에 뒀던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이것이 바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우리가 써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