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황제 탈출기 #0.
2020년 나는 10년 동안의 직장 생활 중 가장 많은 돈을 벌었고, 가장 많은 돈을 썼다. 그리고 이는 매년 갱신될 것이다. 최소한 물가 상승률만큼이라도 연봉은 오를 거고, 나는 그만큼 또 돈을 쓰겠지.
매달 월급날이면 죄책감이 든다. 세 장의 카드를 골고루도 긁고 다녔는데(1장당 30만 원 이상을 긁어야 에어컨, 핸드폰, 대출 이자를 할인받으니까 참 알뜰하기도 하지) 내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타가 오고야 만다. 새 시즌을 장식할 옷이나 최신형 전자제품을 산 것도 아니고, 큰맘 먹고 장기 할부로 지른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실하게도 매일 한결같이 2만 원, 3만 원씩 긁었을 뿐이다. 점심을 사 먹었고, 회사 동료들에게 가끔은 커피를 샀고, 치즈, 아보카도, 닭가슴살, 와인을 샀으며, 룸 스프레이, 러쉬 비누, 모모스 커피 원두를 샀고, 물론 주 1회 이상은 저녁 외식을 했다. 콘텐츠 산업 종사자로서 유튜브 프리미엄, 웨이브, 왓챠,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을 뿐이고, 스마트폰/IPTV/인터넷 결합 요금으로 매달 10만 원 씩을 납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친구들, 가족들에게 밥을 샀으며 선물을 했다. 이렇게 매일매일 쌓아 올린 소비가 12월에는 180만 원가량이었고, 최근 3개월 평균을 냈을 때 이는 정확히 평균이다.
매월 반복되는 소비 죄책감에 대해 털어놓자 J는 가계부를 써보라며 엑셀 양식을 줬다. 소비 날짜별로 정확히 원단위까지 기록하고 고정비/생활비/용돈을 구분해야 하며 저축도 소비 저축과 순수 저축을 나눠서 쓰는 양식이었다. 가계부 쓰기 1차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제로웨이스트, 미니멀리즘에 대한 관심과 카드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 지난 10월부터는 꾸준히 가계부를 쓰게 됐고, 가계부를 써도 소비는 전혀 줄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를 수상히 여겨 J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부끄럽지만 지난 3개월의 모든 소비 기록을 공개했다. J가 나의 소비를 분석한 결과 첫마디가 "황제 같은 생활을 하고 있네"였다. J의 분석을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달라지기로 했다. 보다 가치 있고 계획성 있는 소비를 하고, 매일 무언가에 쫓기듯이 했던 작은 소비를 줄여 큰돈을 쓰고 싶다. 2021년, 지난 10년간의 가난한 황제 같은 소비습관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해야 1년 후 달라진 나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