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월급 연대기: 소처럼 일한자 고개를 들어라

가난한 황제 탈출기 #3.

by 가난한 황제

2011년 5월 1일, 스물아홉의 나는 그날이 노동절 인지도 모르고 근로계약을 체결하러 갔다. 간단한 면접을 마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일단은 11개월짜리 파견직이라고 했고, 내가 원하면 최대 2년까지는 쪼개기 계약으로 계속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파견직이 뭔지 정확히 몰랐고 쪼개기 계약은 더더욱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스물아홉의 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고, 여러 공모전에 도전했고, 실망했고, 버텼지만 더 이상 알바를 전전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첫 월급으로 통장에 130만 원이 찍혔다. IMF 때 대학을 졸업한 사촌언니가 첫 월급으로 받았다는 액수와 같았다. 지금의 회사가 나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대가로 파견회사에 매달 40만 원 씩 내 월급에서 떼어 수수료로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동생과 월 30만 원씩 각출해서 홍은동 낡은 빌라의 월세를 냈고, 공과금을 냈고, 샴푸, 생수, 냉동만두, 쓰레기봉투를 샀다. 그리고 월 3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는데 무려 3년 후 만기 적금을 타게 되며, 그것은 약 10년의 직장생활 중 유일한 만기 적금으로 남게 된다. 역산해보면 쪼개기 계약으로 연명했던 파견직 2년간 월 70만 원으로 살았다는 것인데, 기억이 미화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크게 쪼들렸다는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설, 추석, 생일, 어버이날에는 엄마-아빠에게 각각 10만 원씩 용돈까지 드렸다. 다만 그때 내 소원은 핏이 딱 떨어지는 겨울 코트를 사는 것이었다.




더 이상 쪼개기 계약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파견직 2년의 경력을 발판 삼아 계약직 공채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같은 회사, 같은 자리에 재입사를 했다. 직접 고용 계약직이 되자 파견회사의 수수료가 내 통장으로 들어왔고 복지포인트에 시간 외 근무수당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기에 내 사랑 망원동으로 보증금을 늘려 이사를 하면서 2천만 원 신용대출을 받았다. 2년 균등상환으로 매달 85만 정도를 갚아나갔는데, 그것은 약 10년의 직장생활 중 유일한 대출상환 기록으로 남게 된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파견직 젊은이들을 보면 항상 미안했다. 젊고, 체력 좋고, 빠릿빠릿하다는 이유로 나이 든 정규직보다 더 많은 일을 소화하는 파견직 젊은이들은 월급의 상당 부분을 수수료로 떼어야 했으며, 시간 외 수당을, 복지포인트를 받지 못했다. 같은 일을 하는 또래의 정규직들이 얼마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도 안되며 물어본다고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회사가 필요해서 고용을 했음에도 2년을 꽉 채워 성실하게 일했다는 이유로 잘렸는데, 엄연히 계약 종료이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잘렸다는 표현을 불편해 했다. 내 옆자리 파견직 젊은이가 바뀔 때마다 미안했고, 미안해질 것이었으며, 언젠가부터는 미안함 때문에 곁을 주지 않았고, 차가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계약직인데 그 미안함이 왜 내 몫이어야 할까를 생각하며 비정규직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했을 때 무기계약직이 됐다. 더 늦기 전에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를 고발하고,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내 나이는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고, 20대에 꿨던 꿈을 좇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무기계약직은 말 그대로 무기 징역형을 받은 계약직 같은 거라서 월급은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오를 뿐이었지만 그 즈음 나의 소비습관에 급격한 변화가 생겨버렸다. 막 2년 균등상환으로 신용대출을 다 털어냈는데, 그때부터 생각의 전복이 일어났다. 앞으로 평생 일하고 살 텐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쓰고 살자는 생각이 날 덮쳤다. 어차피 얼마 벌지도 못하는데 더 이상 아등바등 살지 말자, 오늘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 나의 소확행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미래를 위해 허리띠 졸라매던 시절에 쓰던 가닥이 있어서 큰돈은 못쓰고 작은 돈을 매일 쓰게 된 것이다.




2020년 11월 1일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이 된다. 월급이 올랐다. 연봉으로 따지면 10% 정도 올랐는데, 직장생활 10년 차에 처음으로 체감하는 인상폭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월급이 오른게 아니라 그동안 받아야할 돈을 못 받았던 것이었다. 정규직과 차별 없이 일했는데, 월급에서는 차별이 있었고, 그게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정규직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에게 미안했다. 제일 젊고 머리가 잘 돌아갈 때, 한 인간의 노동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우리 회사에서 보내고 있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에게 미안함은 나의 몫이다. NCS시험도 안 보고 쉽게 들어왔기 때문에 10% 정도의 차별은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규직 젊은이들이 나는 안타깝다. 그렇게 억울하면 정규직 입사시험을 치르고 다시 들어오면 된다는 대기업 인사과 부장님인 사촌오빠가 나는 무섭다. 회사에서 필요할 때 회사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 회사에 기꺼이 와준 우리의 동료들, 오늘도 소처럼 일하고 있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의 소 같은 눈빛이 나는 아프다.




약 10년 전 노동절날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의 나에게 여기서 10년 동안 존버 하면 정규직이 될 거야,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신 10년 후 너는 매달 현금 한 푼 없이 카드로만 살게 될 거고, 엄마 생일에 용돈 드리려고 비상금 대출을 하게 될 거야. 몇 푼 안 되는 월급에 중독되어 시나리오 작가는 포기했고, 서른두 살에 결혼할 거라는 스님 예언도 빗나갔어. 하지만 니 나이는 적당해. 늘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야.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었지만, 10년 동안 소처럼 일했고, 나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막 카드나 긁어대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긴 변명 같은 이야기로 끝내고 싶다. 읽고있니 J??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비 습관으로 다시 보는 나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