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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o Nov 29. 2020

어차피 사람 다 힘들다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 감상에는 취미가 없었다. 재미없는 드라마를 봤을 때의 실망감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시간을 날렸다고 생각하면 이따금씩 화가 났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드라마에 취미를 들였다. 주말에 시간이 없으면 드라마를 보곤 했다. 여러 드라마를 봤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쌈마이웨이’다. 설레는 사랑 이야기와 꿈을 쫓는 청춘이 감동을 줬다. 극 중 ‘꿈이 왜 항상 소박해야 돼?’라는 대사는 아직까지고 기억이 남는다. 다들 큰 꿈을 가지고 싶지만, 이루지 못하니 거짓말로 만족하는 게 아니냐는 대사였다. 평소 나도 하고 있던 생각을 드라마로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평범하진 않았던 거 같다. 어른들은 공부를 잘 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능 1등급을 받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성공이 보장된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수능 1등급이라고 하면 상위 4%다. 2등급까지 기준을 내려준다고 해도 상위 11%다. 어른들의 논리대로라면 좋은 인생은 상위 11%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다. 그렇다면 단골 떡볶이집 아주머니의 인생은 실패작인가? 문방구 사장님의 학창시절이 상위 10%같지는 않다. 나는 어른들의 논리에 동의하지 못했고, 이런 말을 하면 시끄럽고 공부나 하라는 얘기를 듣는다.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동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어릴 적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 X자 모양으로 쥐었다. 어머니는 항상 내게 그렇게 젓가락질을 하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제대로 젓가락질을 하기란 7살 아이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운 어린이집에 갔을 때였을까. 새로 만난 선생님도 젓가락직을 X자로 했다. 나는 굉장히 큰 반가움을 느꼈다. 그것은 동지를 찾은 기쁨이었으며,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힘이 나곤 한다.

2019년은 내가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빠져 든 해다. 집 내려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사랑의 불시착’을 봤고, 뜨거운 사랑에 설렘을 느꼈다. 인생 드라마를 꼽자면 ‘이태원클라쓰’였다. 극중 주인공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본인의 꿈을 이룬다. 그 모습을 보면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뜨거워졌다. 나 역시 힘든 상황에 있다. 아버지를 세 살에 잃고, 어머니는 현재 정신병원에 계신다. 가끔은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 때마다 이태원클라쓰의 주인공은, ‘나도 힘든 상황 속에 있어. 우리 함께 이 세상을 견뎌내보자.’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세상에서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받는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원룸에서 매일 잠에 든다. 가끔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며,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도 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당장의 슬픔은 떠나갈 생각을 안 했다. 그 때 드라마가 큰 힘이 되었다. 드라마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드라마 아니겠는가. 아무리 잘 만든 이야기라고 한들 결국 허구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냥 위로가 됐다. 나는 참 별난 삶을 살았다. 애비가 없었고 어머니는 조현병에 앓고 있다. 나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하루하루를 이겨 낸다. 잠자리에 누우면, 그 삶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불쌍한 삶이 없다. 누가 이런 삶에 관심이라도 있을까.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언제나 비관과 함께 잠에 든다. 그런데 인간의 힘듦이 드라마에 소비되고 있다. 어쩌면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은, 내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소비문화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애비가 없다는 게, 어머니가 조현병에 걸렸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드라마에서 노출된다. 공황장애는 이제 너무 흔한 소재가 되었다.

이상하게 안도가 됐다. 난 내 슬픔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차마 누군가에게 말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마치 그런 나를 다독이듯, 세상의 힘든 사람을 보여준다. 그게 참 위로가 된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행복을 느끼자는 게 아니다.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부모 없이 사는 사람이 있으며, 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다. 본인의 상황만 본다면 무너지기 쉽다. 비관만 깊어지다가 혼자라는 고독이 밀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꽁꽁 감추던 치부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흔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만 자신을 가지고 세상과 어울리자. 그대가 혼자여서 힘든 이유는, 여전히 본인 세상 안에만 있어서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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