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공평하다고 믿었습니다. 정확히는 노력은 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출발은 다르더라도,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모든 노력은 똑같다 배웠습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들보다 부족하다면 몇 배로 노력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사실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불평등하다며 투정 부릴 여유 따윈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3살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죽음은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어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네가 어머니를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나이 고작 6살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전부인 어머니, 나를 위해 청춘을 바친 불쌍한 우리 어머니, 아이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형편도 그리 여유롭진 않았습니다. 한 번도 제 방을 가져보지 못할 정도였죠. 여름에는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버텼고, 겨울에는 주전자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대학교는 다녔습니다.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 국가에서 제법 지원금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인생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학교를 한 학기 다니기 위해서는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여행을 가자는 친구들에게 저는 지독하고 정 없는 놈이었습니다. 고작 알바 하나 빠지면 되지 않냐며 투덜댔습니다. 제 생계를 책임질 하루가 그들에게는 고작 하루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도, 방학만 되면 열풍이었던 토익 학원은 제게 사치였습니다. 우선 살아야 했습니다. 일단 살아야 여행도 가고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돈은 없었습니다. 막상 돈을 벌기 시작하니 그저 모아지진 않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싶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습니다. 남들처럼 살진 못해도 남들처럼 보일 순 있었습니다. 다같이 다니는데 혼자 궁상을 떨 순 없었습니다. 친구 한 놈은 그런 저를 보고 분수에 맞게 쓰라며 충고했습니다. 며칠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가난하면 돈도 써선 안 됐습니다.
가난해도 꿈은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공부도 곧잘 해서 장학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대로 열심히 나아간다면 제법 괜찮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고작 서른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조현병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노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더 악착같이 버티며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여전히 돈이 없었습니다. 대학원 학비를 모아야 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죠. 전도사 월급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가장이었고, 어머니는 조현병 환자로 병원에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이든 부딪힐 준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의 길을 걸어야 했고, 정신질환자인 어머니를 돌봐야 했고, 혹시나 모를 어머니의 죽음을 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돈이 너무 부족했고, 부족한 돈이야 더 벌면 그만이었습니다. 일 년 정도를 쉬는 날 없이 매일 일을 했습니다.
몸은 당연히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눈이 떠지질 않아 아침마다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억지로 일어나면 그만이었습니다. 처한 상황이 너무 서글퍼 가끔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닦아내고 웃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괜히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하고, 불안감에 숨을 못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의 고난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지, 무너질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던 어느 날 아침, 늘 그렇듯 눈이 잘 떠지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세상이 빙빙 돌았습니다.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고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다시 자리에 눕자 미친듯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몸의 시위였습니다. 제발 좀 쉬라는 몸의 아우성이었습니다. 세상은 평등하다 믿었습니다. 환경이 부족하다면 더 열심히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꼴이 참 웃겼습니다. 당장 발 한 걸음 떼지 못해 숨을 헐떡이는 꼴이었습니다.
아, 열심히나 살 때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