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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Apr 02. 2020

'베아트리체 첸치'를 기억하며

560년 전의 그때의 사건을 재현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가슴 아픈 곳. 죽기 전에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던 나라. 이탈리아 로마. 그곳에서는 긴 시간을 견디며 닳아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르네상스를 열었던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를 잇는 긴 시간의 터널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로마 고예술 국립 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한번 그림을 쭉 훑어보다가, 한 여자의 초상 앞에서 멈춰 섰다.  홀린 듯 한동안 계속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치명적 아름다움와 그녀와 얽힌 비극적인 서사가 어우러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이끌어냈다.


그녀가 처형당한 곳은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로 이 곳, 테베레강을 가로지르는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다. 그 양 옆을 지키는 성물(聖物)을 든 10개의 천사상이 행인을 지킨다. 이 천사상을 만든 이는 이탈리아 조각의 거장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이다. 천사의 다리 위에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봤다. 어스레한 저녁이 되고, 거리의 조명이 붉게 켜졌다. 눈을 감았더니 천사상이 허물어지고 역사의 한 장면이 개막했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가 태어나기 1년 전, 1599년 9월 11일. 이 소녀가 처형당했던 그때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많은 군중이 무리 지어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귀족 집안의 어린 소녀와 그녀 가족이 끌려 나왔다. 이 가냘프고 아름다운 소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이다. 이 소녀는 가족과 공모하여 아버지(프란체스카 첸치 백작)를 존속 살인했다. 알려진 이야기는 이러하다. 아버지의 잦은 학대와 성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가족들과 암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은 이 소녀를 안타깝게 여겼던 계모와 오빠, 이복 남동생, 두 명의 하인이었다. 처음에는 하인이 독약을 먹였지만 죽지 않자, 망치로 내려쳐 끝장을 냈다. 발코니에서 시체를 던져 실족하여 추락한 것처럼 꾸몄다. 백작의 죽음을 미심쩍게 여긴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가담했던 하인 한 명을 추궁했다.  하인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죽기 전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그림 피오 칼베티’라는 이름을 가진 이 하인은 사실 그녀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고 하니, 고통받는 그녀를 매일 봐오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와 쌓았던 비밀스러운 기억은 그와 함께 잠들었다. 하지만 이내 모든 일이 들통나게 되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있는 모든 사람이 결국 체포되었다.


모여든 군중인 이미 이 소녀가 겪었던 불행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베이트리체는 사실 당국에 폭력적인 아버지를 고발했었다. 높은 귀족 신분이었던 그는 몇 차례 붙잡갔지만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 오히려 고발한 사람이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방에 있는 자신의 성에 가둬버렸다. 시민들은 익히 그의 됨됨이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 8세에게 이 소녀를 벌하지 말라고 탄원을 올렸지만 영향이 없었다. 보수적인 카톡릭에서 근친상간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이었거니와 존속살인은 사회를 유지시켰던 계급적 체계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었다. 또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싶었던 교황이 욕심이 더해져 결국 사형 선고를 내렸다.


어린 남동생을 제외하고 모두  차례로 처형되었다. 먼저 그녀의 오빠는 고문을 받다가 커다란 망치로 맞아 머리가 으스러지고, 시신은 조각났다. 계모는 도끼로 머리가 잘려나갔고, 베아트리체 그녀도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모여든 군중은 단지 이 처형의 장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숨죽이며 볼 뿐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애처로운 사연과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해져 무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이 군중의 무리에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자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천재화가,  27살의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도 있었다. 이 때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으로, 밀라노에서 로마로 이주해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어가고 때였다. 아름다움과 비극이라는 강렬하고 치명적인 소재는 카라바조의 그림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게다가 그녀의 처형 장면은  탈옥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환영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교황은 누구든지 카라바조를 보면 그의 목을 베고 가져오라는 최고형을 선고하면서 카라바조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사면을 원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또 다른 목격자, 이곳에는 25살의 청년 귀도 레니(Guido Reni)도 있었다. 귀도 레니는 감옥에 갇힌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그렸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은 그의 제자 지오반니 안드레아 시라니에게 갔고, 그의 딸,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이 그림을 발견하고 모사했다. 다시 그려진 베아트리체의 초상에서는 베아트리체의 애련한 모습이 절정에 달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이 떨어질 듯 맑고 선명했고, 살짝 미소 띤 입술은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 결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였고,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원작을 그린 귀도 레니의 제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술 주정뱅이였고 폭력을 일삼아 그녀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림을 그려 돈을 벌게 시켰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늘 밝은 기운이 넘쳤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여성화가의 편견을 깨고 이탈리아 베로냐에서 비록 명성을 얻었지만, 너무 열심히 일했던 탓인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27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런 삶을 살았던 그녀가 60년 전에 산타젤로 다리에서 처형된 이 소녀의 초상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어쩌면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던 한 어린 소녀의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베아트리체 첸치를 다시 부활시켰다.


베아트리체 첸치가 죽은 지 52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은 마치 시간의 강을 타고 지금 여기까지 흘러내려와 생생히 전달된다. 1599년 9월 11일을 기억하는 군중들의 안타까운 마음과 예술가들의 작품이 계승하여 그때의 장면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리고 먼 이국 땅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 그녀를 기념한다. 부디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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