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를 비롯해 식구 모두가 조용한 편이라 어느 자리에서건 목소리의 볼륨은 낮고 듣는 귀만 열어놓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결혼을 했는데 시댁의 분위기는 달랐다. 아버님의 목소리는 컸고, 어느 자리에서건 아버님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솜씨.
유머가 섞인 유쾌한 말주변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다. 아버님은 스타성이 충만한 분위기 메이커였던 것이다. 목소리도 우렁찼던 아버님이 언제부턴가 목소리에 힘이 없고 말수가 적어지셨다. 어지럼증이 시작되고부터로 기억된다. 어지럼증으로 시작된 건강은 폐렴을 심하게 앓으시고는 응급실과 입퇴원의 반복, 그리고 암발병까지 몇 해의 힘겨운 시간을 거치며 씩씩하고 유쾌하던 아버님의 모습을 조금씩 무너지게 만들었다. 수술과 치료가 가능하지 않다 했지만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않으셨기에 왠지 툭툭 털고 일어나실 것만 같았는데 의사의 3개월 정도 남았다는 냉혹한 통보가 있은 뒤로는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시더니 급기야 그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평소 존재감이 컸던 아버님이셨기에 그 빈자리도 훨씬 크게 느껴진다. 어디선가 아버님의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례를 치르고 난 며칠을 호되게 아팠는데 열이 오르내리던 어느 날 꿈에 아버님이 나왔다. 꿈에서 아버님은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문 앞에 멈춰 서시더니 문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서 계시기에, 서둘러 아버님 옆으로 걸어가 "아버님 걸으셨네요? 너무 잘하셨어요."라고 말씀드리고 문을 열어 드리니 문 가운데 걸터 서시며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는 위치에 서 계시는 것이다. "아버님 최고예요. 여기까지 걸으시다니 정말 멋져요. 정말 잘하셨어요."라고 말씀드리니 내쪽을 보시며 함박웃음을 지으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잠에서 깼다. 생각해 보니 아버님은 환자복이 아닌 여름 양복을 입고 계셨고,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하지 않듯 아주 잘 걸으셨다. 삶의 고리를 끊고 죽음의 세계로 잘 안착하셨음을, 더는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던 꿈이다.
1인 병실에 아버님과 식구들이 며칠을 번갈아 함께 보내며 아버님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나누며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먼저 가신 아빠 생각도 많이 났더랬는데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짧은 면회 시간만 함께 했기에 식구들과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식구들에 둘러싸여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가신 아버님. 그 손을 꼭 잡고 두려움을 떨쳐 내도록 힘을 실어 드리면서도 그렇게 해드리지 못한 아빠와의 마지막이 오버랩되어 죄송하고 되돌릴 수 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