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명절 증후군'이라는 것을 오래 앓았다. 시어머니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기에 명절마다 식구들을 위한 음식 준비는 모두 외며느리인 내 차지였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갈비찜과 녹두전은 빠지지 않는 메뉴였고 그 외에 무엇을 할지는 매해 고민거리였다. 장 보는 일부터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버거운 일이었고, 조금만 무리하면 재발하던 목디스크는 명절 증후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설거지를 한 번에 못하고 몇 번에 나눠해야 될 정도로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통증이 심해 주저앉아 울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기껏해야 시누네 식구 포함 여덟 명의 식사 준비지만 내겐 늘 부담스럽고 어려운 숙제였다. 미식가인 아버님의 입맛을 맞추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내 삶의 중심은 늘 시부모님의 의중을 기반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밤새 보초를 서는 보초병의 심정으로 말이다. 이제와 그때의 나를 돌아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내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들의 삶에 맞춰가며 나를 희생했던 긴 시간들. 내 삶의 중심을 시부모님께 맞추고 남은 잉여의 시간만을 내게 허락하며 산 것 같다. 그 시간 언저리에 늘 붙어 다니던 불만과 부정적인 생각들.. 그 안의 어리석음이 내 몫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지난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우리 세 식구만 함께 보내게 된 추석은 단출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했다. 시누이도 아버님 장례 후 어머님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니 호랑이만큼 무서워 늘 눈치 보게 만들었던 시어머니의 그 좋던 기세도 조금씩 수그러들게 되고 시어머니에게 찾아온 외로움의 무게도 가늠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늘 식구들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를 낙동강 오리알처럼 뚝 떼어놓으려 했던 시어머니의 불편한 마음자리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예전과 다른 과장된 친절이 낯설기만 하다.
이번 추석은 날이 흐리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지난여름 아버님 돌아가시고 두 번째 맞는 추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