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인,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어도 난 아직은 아니지 않을까란 실낱같은 희망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막연한 언젠가의 운명은 받아들이면서도 늘 비껴갈 것 같은 마음으로 삶을 과신하게 되고, 밀려오는 파도에 물이 닿지 않으려 재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먹구름처럼 덮치는 죽음을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하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심리일지 모르겠다. 삶의 시작점부터 우린 죽음을 선고받은 자들이지만 어리석게도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죽음을 마주한 이반 일리치는 커다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독을 만난다. 산 자들은 그 고독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곧 죽을 자의 자리를 밀쳐내기 바쁘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선명하게 그으며 자신들의 자리를 더 공고히 만들기에 바쁘고, 죽음의 자리에 선 자는 자신을 동정하는 이들의 가식과 기만에 치를 떨고 살아온 삶의 궤적을 훑으며 무너지는 육체와 정신을 부여잡은 채 자신과의 싸움으로 치열하다. 잘못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열심히 달려온 시간의 억울함이 충돌하지만 그 '열심히'의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기만적 삶의 모순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살아야 했었는가를 자문한다. 그러나 나눌 수 없는 고통과 고독의 정적 속에서도 하인 게라심의 조건 없는 연민과 어린 아들로부터 전해지는 진심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시간에 사랑의 마음이 스밀 수 있게 만드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톨스토이는 부족함이 없는 금수저의 삶을 쥐고 태어났지만 2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세에 아버지를 잃는 불행을 겪는다. 부모님의 부재에도 친척과 형제들의 사랑과 우애는 돈독하여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은 그의 삶을 방황하게 만들고 급기야 허무주의로 까지 몰고 간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집어삼키듯 잠식시키자 우울과 허무가 삶에 균열을 일으키고 목을 매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려 눈에 띄는 곳의 밧줄들을 치워가며 죽음을 향하지 않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농민들의 삶과 신앙은 죽음을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다시 회생하는 깨우침을 얻으며 마치 구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참회록>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뉘우치고 회심回心 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도 달라졌다. 글은 좀 더 단순해지며 그 안에 도덕적 삶, 신앙의 삶을 지향하는 색채가 짙어지고, 양심을 향한 내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회심 전과 후, 톨스토이 작품의 세계는 그의 내면의 변화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인스타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던 지인이 딸의 출산 이후 소식이 뜸해져 할머니의 삶이 더 바빠진 모양이라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부고 소식을 받았다. 그 사이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길지 않은 투병 생활을 마치고 영면하셨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함께 차를 마시고 제인 오스틴을 이야기하고, 그림책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늘 소녀 같았던 그분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한데 더는 들을 수 없고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움이 밀려왔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막연하게' '언제가'라는 단어들을 품고 안일하게 시간을 저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빛나게 사는 사람,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하인 게라심의 삶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처럼 흐르듯 살아가지만 늘 깨어서 사람의 마음을 향하는 진심을 놓지 않는 삶의 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