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와 <드라이브 마이 카> 조수석에 앉아보기
엄마 친구 현제아줌마 기억나제?
엄마가 서른 한 살 때일끼다. 현제아줌마가 그라더라고. 머라카더노, 거 운전면허 딸 기라꼬.
그래서 마 엄마가 그랬다. 아니 여자가 운전해가 머하겠노. 니 말라 따노.
둘이서 그래가 마 한참 웃고 그랬데이.
그래가 시간이 마 지금까지 이래 흘러왔고
이제 아줌마나 엄마나 둘 다 칠십을 다 능가뿟네.
아줌마는 엄마 기억에도 한 열번은 떨어짔을끼다. 근거이 시험에 붙었다 아이가.
그래가 이적지 운전 내 하고 댕긴다.
현재아줌마 안있나. 마 한달에 한 두 번씩 엄마 나오라 캐갔고 여, 저 바람 쎄아주고 그란다.
그리고 엄마는 앞으로
중허이 니가 '똥차'라도 한 대 사주모
이 절, 저 절 사찰이나 다니고 싶데이.
그기 마 앞으로 엄마가 제일로 하고 싶다.
근데 마 우짜노.
이제 면허를 딸 수 없다 아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친척 결혼식에 갔다 오는 차 안에서 한바탕을 했다. 친척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기대할 것도 없고 기대하지도 말자고. 상처주지도 상처받지도 말자고. 제발 앞 뒤 옆 신경 그만쓰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자고. 스스로 뭐이리 화낼 일일까 싶었는데 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타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께 감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한참을 들으시던 어머니는 뜬금없이 '똥차' 얘기를 꺼내셨다.
똥차. 똥차가 뭘까.
1. 글에서 언급할 <노매드랜드>와 <드라이브 마이 카>만 두고 비교하자면 <노매드랜드>의 '펀'이 몰고 다니는 캠핑카(밴)이 똥차에 가깝겠지. 국내에서는 캠핑카가 홈쇼핑에서 워너비 아이템으로 다뤄질 정도지만 펀의 봉고는 춥고 남루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영화 시작부 좁은 차 안에서 고기도 굽고 빵도 데워 먹는 펀의 모습에 저양반 갬성 좋다 착각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순차적으로 현타를 배치하며 마 이게 미국 극빈층이다를 보여 준다. 대단위 컨베이어 벨트 위 수백 수천의 택배 박스가 연쇄하는 애머전(모두 다 아는 그 Amazon 맞다)의 광활한 광경하며, 식스 시그마가 적용된 게 분명한 기계적 레스토랑 주방 그리고 여기는 자는 곳이 아니라며 차문을 두들기는 주차장 관리자의 으름장까지 펀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의 잭 니콜슨 마냥 까치발로 통통 거리며 잘도 돌아 다닌다.
펀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캐릭터 연구와 구현에 있어서는 장인으로 불린다는 것에 비춰보건데, 백퍼 그녀는 아마존, 아니 애머전과 레스토랑에 잠입하여 장기 근무를 해 본 것이 틀림없다. 손놀림 하나, 동료들과의 농담 하나 어색함을 찾기 힘들다. 찐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하튼 똥차 그 자체다.
2. 내 오른쪽 허벅지 안쪽 면에는 손바닥 만한 잎사귀가 있다. 나는 이 잎사귀를 받아들일 때까지 정확히 이십년이 걸렸다. 문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태어날 때부터 표피가 얇아 힘줄이며 핏줄이 고스란히 보인다. 해부학 서적의 그림을 생각하면 된다.
초등학교 때 여름만 되면 스트레스가 심했다. 등교 전 반바지를 입고 큰 붕대와 반창고를 들고 이래저래 붙여보다 포기하고 집을 나간 적이 여러번이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멀찍이 모른척 하셨다. 고등학교 때 쇼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아버지가 '아이고 여는 아직 이릏나. 이 와 안 없어지노...'하며 허벅지를 문질렀던 기억도 난다. 친구들이 제발 몰랐으면 쳐다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학창 시절 나의 여름은 은근한 스트레스의 시기였다.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무력감. 나의 잎사귀는 그렇게 지겹게 나를 따라 다녔다.
군대 때 잊게 된 것 같다. 어쩔수 없는 상황, 똑같이 던져 준 짧은 반바지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서 입어야 하는 군대. 잎사귀의 무력감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존엄의 통제. 그곳에서야 나는 감출 수 없었고 강압에 의해 드러낼수 밖에 없었다. 아예 대놓고 보여주니 처음 신기해 하던 선후임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무뎌짐이 반복되고 별다른 상념을 주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제껏 지속되었던 나만의 부끄러움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단절하게 되었다. 잊게 되었다.
3. "난 기억만 하면서 인생을 다 보낸 거 같아요, 밥"
<노매드랜드>에 대한 평론과 기사를 여기저기 찾아보니 최고의 대사로 '우리 아버지는 그러셨죠.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다'를 꼽는다. 왜 뭘 꼭 기억해야만 할까. 그것은 일종의 기억도착증이 아닐까. 상처를 흔적을 잊는다는 것은 멀까. 기억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뭘까. 기억에 상처에서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그 상처가 지울 수 없이 계속 그대로 남아 있다면.
4. 두 영화는 그래서 연결되어 있다. 차는 계속 가지만 길은 놓여져 있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다. 그 길이 미대륙 한복판 초원의 길이든, 시부야를 가로지르는 다리위 든 계속 그 위를 달리게 되어 있다. 바퀴는 앞으로 하염없이 굴러가고 과거라는 길과 계속 떨어진다는 것. 과거라는 단어와 단절한다는 것. 길을 따라 계속 드라이브를 해야만 기억과 과거에서 멀어지고 그래도 '기대'할 만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5. 그래서 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속 마이클의 마지막 이 대사를 사랑했나 보다.
"잘가. 또보자, 빌리."
(이번 시즌에서는 '안녕, 빌리'로 바뀌었다. 흥)
6. 나는 직전 회사의 감당치 못할 사건으로 정신과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 받았다. 근본은 조직의 문제고 원흉은 사람이었다. 퇴사 이후에도 불안과 우울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펀을 만났다. 기억에 갇힌 펀의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펀의 밴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약을 끊게 되었다.
앞으로 나의 드라이브도 우리 엄마의 드라이브도 그 여정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대할 만한 여정'이 있기에. 그 기대는 고스란히 내가 정하면 된다. 온전히 나의 기대가 나의 미래인 것이다. 그렇게 드라이브가 된다.
다 쓰고 나니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최고의 영화인데. 미안해요, 가후쿠. 헌데 마지막 씬의 한국 마트는 좀...그건 너무 깼어요. 그거 찍은데 마 부산 맞다 아인교.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