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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May 04. 2023

"오늘의 날씨도 맑음."

망한 하루 쯤은 말간 미소를 지으며 흘려보내기를.


"오늘의 날씨도 맑음."


맑은 날씨, 맑은 하늘, 맑은 아침, 맑은 마음, 맑은 미소. '맑다'라는 단어가 좋다. 어렸을 때부터 물기가 낭낭한 수채화가 좋았고, 콘크리트 옥상에서도 열심히 자란 석류나무 열매의 맑고 붉은 과육이 좋았다.


덧칠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냉소적이고 건조한 세상에서 촉촉함을 품은 그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맑다'라는 단어는 잊혀져갔다. 새 그림을 그리기 두려워서, 실패를 감추고 싶어서, 자꾸만 물감을 덧칠했다. 스스로를 불운하다고 여겼고,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냉담한 사람이 되어갔다.


실패한 연애를 인생의 실패로 여겼고, 모두가 나를 꼴좋은 패배자로 볼까봐 도망쳤다. 공부하던 분야에서 용의 머리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잘난 체는 하고 싶었던 지저분한 마음으로 선생님이 되려 했다. 그래놓고 사범대 편입 전형이 바뀌자 '이것 봐, 나는 불운하다니까.' 생각하며 쉽게 포기했다. 마치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모든 일을 크게 부풀려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으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나를 동정한 사람들 모두를 비난했다.


맑은 마음을 되찾고 싶었다. 이름을 바꿨다. 나는 내 이름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바꾸지 못했던 건 유난떤다는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서, 그리고 부모님의 반대에 어설픈 효녀 행세를 하느라 였다.


내가 직접 지어 내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살고 싶었다. 개명을 할 때 철학관에서 받은 이름감정서, 작명증서가 있으면 유리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정직하게 사유만 적어 제출했다.


"뾰족하고 까칠해져가는 제 모습에서 변화하고 싶습니다."


개명은 통과가 됐고, 나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됐다. 새 이름에는 '맑다'라는 의미의 한자를 넣었다. 별처럼 밝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당연히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지은 이름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의아해하던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잘나기 힘든 분야였다. 그런데 하고 싶었다. 힘든데도 계속 하고 싶었다. 그냥 좋았다. 내가 창작한 작업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좋았다.


매일이 맑은 날씨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몇 번의 연애를 실패했고, 저지른 일들은 매번 실패에 가까웠다. 맑은 하루를 유지하려 애써도 툭하면 탁해져 망한 하루도 많았다. 그런데 세상은 원래 엉망진창이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우주의 원리를 깨달아 가고 있달까.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심각한 가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 실패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흐르고 흘러갈 것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으니까. 잔뜩 비를 맞아도 흐르는 맑은 강물이 되어 깊은 바다가 될 것이다.


세찬 비가 내린 후의 바다는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지. 나는 내가, 그리고 당신이 꼭 그런 깊고 맑은 바다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망한 하루 쯤은 말간 미소를 지으며 흘려보내기를. 그리고는 내일 다시 힘차게 흘러가길.


"소나기가 내렸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날씨는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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