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학습 덕후다. 예전 직장동료가 나를 '자기 계발의 화신'이라고 불러서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정작 자기 계발서류의 책들이나 '자기 계발'이라는 말 자체의 어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나는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는 것이 신선하기도 했었다. 굳이 자기 계발을 하겠다고 한 일들은 아니지만 취미미술로 시작된 덕질이 디자인, 사진, 코딩, 모션그래픽 등으로 번져나가서 학원과 인강에 쏟아부은 금액들을 합치면 대학 등록금을 훨씬 상회하리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남들의 후기를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나는 그 수많은 수업들을 들으면서 후기 한 줄 남기지 않은 배은망덕한 인간이었음을 반성하면서, Udacity User Experience (UX Designer) Nanodegree 수강후기 겸 수업 중에 진행했던 개인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Udacity Nanodegree에 대한 소개는 이수진 님의 글 참고.
전혀 디자인적 배경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고, 전혀 상관없는 업무를 하다가 기획서와 프레젠테이션으로 상사들을 설득해서 없던 디자이너 자리를 새로 만들어서 디자이너가 된 나는 늘 Imposter Syndrom에 시달렸다. 뭔가 분명히 더 체계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나만 몰라서 삽질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구심에 시달렸지만, 황무지에서 혼자 길을 닦으면서 달려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상한 길이라도 일단 만드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디자이너라고 쓰고 콘텐츠 기획/제작, 마케팅, Front-end 코딩, 사진/영상 촬영 및 편집이라고 읽는 상황에서, 미디엄에 나오는 것 같은 User Research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마침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퇴직을 해서 몇 달 간의 여유도 생겼고, 코로나 때문에 다른 학원들은 다닐 수도 없으니,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그 사치 좀 부려보고 싶었다. 실리콘밸리 디자이너들이 직접 가르치고 프로젝트 리뷰도 해준다는 웹사이트의 문구가, 혼자 일하면서 다른 디자이너들의 피드백을 받을 길 없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질렀다. 무려 1,277,091원.
플렉스 해버린 후에는 스멀스멀 불안한 생각이 몰려왔다. 예전에 Introduction to Programming Nanodegree도 몇 십만 원을 주고 프로젝트를 다 마치지 못해서 수료증도 받지 못하고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야근이 너무 잦아서 불가피하기도 했지만, 프로그램도 그렇게 추천할만하지는 않았다. 다소 이론적인 수업인데, 제출해야 하는 프로젝트는 수업에서 들은 내용만으로 혼자 해내기에는 벅찼다. 다행히 이번 수업은 달랐다. UX desginer들이 만든 수업이어서 그런지 확연히 월등한 학습경험을 제공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수강료의 2-3배에 해당하는 가치를 제공한 수업이었다.
웹사이트 수업 소개를 보면 'real-world project'라고 되어있어서 연계된 회사들의 미니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수행하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개인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에 방법론들만 따르고, 데이터는 직접 수집했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가족이나 지인을 인터뷰해보도록 하고, 좀 더 많은 양의 인터뷰 데이터가 필요한 프로젝트들에서는 Udacity 측에서 이미 인터뷰해놓은 자료들을 제공해주는 식이다.
3개월 내에 수업을 듣고 6개의 프로젝트를 시기에 맞춰 제출한 후 모두 통과하면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마지막 과제는 Linkedin 프로필을 만들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opt-out해도 되고 꼭 기준에 맞아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5개의 프로젝트를 제출하는 셈이다. 5번째 프로젝트는 수업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업을 성실히 잘 따라가면 포트폴리오에 추가할 수 있는 아이템이 생긴다는 장점이 있다. 프로젝트별로 제출해야 하는 과제들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a. Project 1: User Research Plan / Research Report / Rough Design Sketch
주어진 템플릿에 따라 A4 8장 정도의 리서치 플랜과 실제 리서치 리포트(11개 슬라이드)와 아주 대략적인 디자인 스케치를 제출해야 한다. 물론 영어로! 나는 여기서 또 한 번의 플렉스를 감행했는데, 관절 통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 앱을 정말로 디자인해보고 싶어서 userinterviews.com이라는 사이트를 통해서 미국 현지에서 일주일에 2-3번 운동 앱을 이용해서 홈트를 하는 20-40대 여성들을 모집해서 Zoom 인터뷰를 한 후 그 결과를 제출했다.
userinterviews.com은 내가 감당 가능한 예산 범위 안에서 어떻게 하면 조건에 맞는 사용자들을 빠른 시간 내에 모집해서 인터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구글링 해서 알아낸 사이트인데, 비싼 거 빼고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비용은 대략 1 인당 40불(리쿠르팅 대행비용) + 40불(인터뷰 참여자에게 Amazon Gift카드로 지급되는 비용, 지급도 대행해준다) 정도가 소요되었다.
b. Project 2: Miro Board 제출
Research Synthesis, Ideation, Feature Prioritization, Low Fidelity Prototype, Customer Journey Map, Low Fidelity Usability Testing Report 등을 Figma와 Miro를 이용해서 제작한 후 그 링크를 제출해야 한다. Figma 속성 코스도 강의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다.
c. Project 3: High-Fidelity Prototype, Style Guide, Pattern Library, Interactive/Clickable Prototype
d. Project 4: High-Fidelity Iteration
Project 3에서 제출한 내용을 Accessibility 기준에 따라 개선시키고, 추가로 10명의 새로운 user를 모집하여 Lookback이라는 툴을 이용해서 사용자 테스트를 한 후 그 리포트와 개선된 프로토타입의 피그마 링크를 제출한다. 결과물뿐 아니라 버튼 하나를 바꾸더라도 내가 어떤 근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꽤 까다롭다. Lookback 테스트는 Udacity 게시판에서 수강생끼리 서로서로 테스트해주면 되기 때문에 몇몇 친구들 외에는 따로 사람을 모집하지는 않았다. Lookback은 UsabilityHub에 비해서 비싸지만 사용자가 앱을 써보는 화면이 녹화된 비디오(옵션)와 오디오가 제공되는 것은 큰 장점이다.
(Icon은 Icons from Streamline I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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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Project 5: Final Portfolio & Learning Reflection Write-up
슬라이드 16장 정도의 포트폴리오와는 별도로 A4 1-2장 정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발견한 디자인 인사이트와 자신이 배운 점을 기술하는 문서도 제출해야 한다.
a. 실용적인 내용
정말 실무에 바로 쓸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는 점이 좋았다. 독학으로 공부할 때에는 UX이론에 대한 글을 주로 읽다 보니, 상식적인 내용을 과도하게 이론적으로 포장하는 거 아닌가 싶은 느낌도 있고 뭔가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이 없잖아 있었는데, Shuang Liu라는 구글 출신 선생님이 이런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상식적이면서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고 무엇보다도 너무너무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다.
b. 차근차근 따라가면 과제도 어렵지 않아요
어떤 프로그램들은 그냥 개론만 던져주고 과제는 알아서 하라고 해서 망연자실하게 되는데, 이 수업은 배운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면 무리 없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C. 명확하고 상세한 지표
각 단원마다 그 단원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지 명확하고 상세히 rubric으로 제시가 되어 있다. 한 단원을 시작하기 전에 읽고, 과제를 만들어서 대조해보고, 한 개씩 체크리스트에 줄을 그어가며 제출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리뷰어들도 동일한 rubric에 기반해서 요구사항들을 다 만족하는지 체크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어 피드백을 준다. 요건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피드백을 주고 다시 제출하도록 한다. 피드백의 질은 리뷰어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성실히 읽어보고 구체적으로 의견을 주는 편이다. 물론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직접 리뷰를 해주는 건 아니고 리뷰어들은 따로 있다.
a. 영작의 압박
요구하는 글의 양이 상당하다. 내가 디자인 수업을 듣는 건지 Writing 수업을 듣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제대로 영작을 원 없이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문법적 오류나 어색한 문장을 가지고 리뷰어가 뭐라고 하는 경우는 없으니 안심하자.
b. 시간의 압박
웹사이트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10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직장인이라면 하루에 1시간씩 투자하고도 주말에도 온전히 5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c. 회사들이 나노디그리를 알아줄까?
글쎄...모르겠다.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 나노디그리의 시장가치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 '나는 정말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것 보다는 이런 저런 배움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게 더 설득력 있다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a. 단 한 명의 사용자하고 라도 이야기해보자
정말 바쁘고 예산도 쪼들릴 때는 아예 user research나 usability testing 자체가 엄두가 안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단 한 사람의 user 하고라도 얘기해보거나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b. 완벽주의 치유?
뭔가 만들어서 유저와 테스팅하고 선배 디자이너에게 피드백받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반복하다 보니, 후반부에는 자연스럽게 '크리에이터 나'와 '편집자 나’가 분리되는 신박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수업만의 효과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지난 수년간 완벽주의적 성향을 벗어나려는 힘겨운 노력의 마지막 한 방울이 된 느낌이었다. 어차피 내가 완벽하게 하려고 해도 못 보는 앵글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빨리 고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니까 일하는 속도가 한결 빨라지고 심적 부담도 후반부로 갈수록 훨씬 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