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시작해서 줄곧 한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언제나 회사 밖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소녀가장이었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던 외국생활도 해보고 싶다는 환상도 있었다. 남들이 신이 숨겨놓은 직장이라고 하는 좋은 직장이었지만 뭐든지 올인하는 성격이라 워라밸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영혼 없이 시간을 딱딱 지키면서 할 일만 하고 퇴근하지도 못했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하루 8시간씩 앞으로 남은 인생을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목구멍이 시멘트로 차오르면서 점점 굳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을 즈음에 엄마 상태가 악화되어서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엄마는 그 고비도 예전의 무수한 고비들처럼 또 넘기셨지만, 중환자실 앞에서 멀뚱멀뚱 흰 병원 벽을 바라보면서 엉뚱하게도 내가 지금의 엄마처럼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뭐가 제일 후회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흥미를 느꼈던 분야들에서 내가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흥미들이 자라나서 꽃필 기회 조차주지 않고 엄마 간호를 하다가 늙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관상으로나마 나는 얼마나 달콤한 중산층의 삶을 잘 살고 있는가. 이렇게 안정적인 삶을 박차고 나갔는데 바깥세상은 별다를 게 없고, 내 재능도 별 볼일 없어서 시도를 안 하니만 못했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하나. 너무 겁났지만 더 늦기 전에 스스로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 영원히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항상 엄마를 간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뭔지, 하고 싶은 건 뭔지 스스로에게 묻지조차 않았다. 물으면 뭐하나. 알게 되면 더 마음만 아프지. 그렇게 덮어두고 덮어두었던 마음이 견딜 수 없는 공허감으로 역습해왔다. 내 전 존재가 어느 순간 땅 속으로 푹 꺼지면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결단이 필요했다.
한 번도 와본 적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외국에 혈혈단신으로 와서 한 고생은 예상보다 강도가 높았다.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꼰대 문화와 신참을 괴롭히는 문화는 존재하면서 한국의 편리함은 없는 외국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서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고비들을 견디고 그렇게 원했던 디자이너로서의 전직에도 성공한 지금은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한 걸음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은 언제나 상존하고, 한국 같은 삶의 안정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라도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면서 불확실성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태도로 삶의 방식을 전환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눈을 떠보니 내가 독수리가 되어있었다. 왼손을 올려서 바라보니 독수리 발톱이 보여서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웠는데, 나는 절벽 위에 서 있었고 발밑은 끝도 없는 낭떠러지였다. 무서웠다. 발밑 암흑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소스라치며 놀라서 잠을 깼는데, 며칠 후에 꾼 꿈에서는 독수리 몸에 잘 적응해서 찬란하게 아름다운 벌판 위를 날고 있었다. 무서워서 절벽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다른 삶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