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반 토막난 포도 생산량
포도는 생각보다 유래가 긴 과일이다. 신라 시대에 사용된 포도무늬의 기왓장이 발견되고 문헌상으로는 중세인 조선 시대에 포도가 많이 재배됐다고 나와 있다.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이 유명하며 포도를 소재로 한 민화도 많은 편이다. 이는 포도가 다산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과일문화 특징은 생식과 당도로 표현할 수 있다. 유럽 등 서양에서는 과일을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가공하거나 조리해서 먹는 방식이 많지만 한국은 날로 먹는다. 그렇다보니까 과일 고유의 향보다는 당도를 선호하는 편이다. 한국 과일상점에서 ‘꿀보다 더 달다’는 표현내지는 꿀맛이 들어가는 홍보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포도는 대부분 포도주나 음료용으로 한국에서는 포도 역시 생으로만 먹는다. 간혹 술을 담그지만 소량이다.
반 토막 난 포도 생산량
포도는 높은 당도를 자랑하는 과일이지만 국내에서는 생산이 매년 줄고 있다. 2000년 47만5594톤까지 생산했던 포도가 지난해에는 20만톤으로 절반 이상이 줄었다. 포도 생산이 줄어든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한칠레 FTA로 인한 칠레산 포도수입이 주요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칠레 FTA로 인해 칠레산 포도수입액은 2003년에 9000톤에서 2013년에 4만7000톤으로 늘었고, 금액기준으로도 같은 기간 1400만 달러에서 1억44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여기에 체리, 망고의 수입 증가도 한 몫 하면서 가격이 하락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포도 중에서도 시설포도의 출하시기가 체리, 망고 등의 수입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농경연 연구결과에 의하면 체리 수입량이 10% 증가하면 포도는 0.39% 가격이 하락한다. 가격이 하락하면 농가들은 생산을 포기하게 된다.
정부는 국내 포도재배면적이 줄기는 했지만 포도농가 수입이 1000㎡당(300평, 10a) 연간 소득은 2003년에 225만원에서 2012년에는 435만원으로 증가해 한칠레 FTA영향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칠레산 포도 수입이 증가하면서 국내 가격이 하락하자 농가들은 소득 감소를 막기 위해 재배면적을 규모화를 했다. 이로 인해 소득이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농지 매입 또는 임대비용과 비가림시설 설치비용, 그리고 각종 농자재 가격 인상으로 소득은 수치상 증가했지만 실질적 순소득은 감소했다는 것이 농가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수입이 증가하는 것을 막고 국내 포도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칠레와의 FTA협상에서 계절관세를 도입했다. 한국에서 포도가 생산되지 않는 11월부터 그 이듬해 4월까지만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계절관세를 도입했지만 수입량은 절대적으로 늘었다.
FTA 대책으로 도입한 계절관세는 전혀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칠레는 남반구이기 때문에 포도 수확시기가 한국의 겨울철이다. 반대로 칠레는 한국의 포도수확기인 여름엔 포도가 생산되지 않는 여름이기 때문에 계절관세가 없어도 수출을 할 수가 없다. 포도는 저장성이 낮아 2~3개월까지 냉장저장은 가능하지만 여름철에 수확해서 겨울까지 냉장보관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칠레산 포도는 계절관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4월에 상당한 양을 수입해서 냉장 저장을 해 한국에서 6월 7월까지도 칠레산 포도를 판매하고 있어 보이지 않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FTA로 인한 관세철폐기한을 10년이기 때문에 2014년부터 수입하는 칠레산 포도에는 관세가 없다. 무관세로 들어온다. 2016년부터는 미국산 포도가 무관세로 들어온다. 향후 포도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이유다. 여기에 망고, 체리 등 새로운 수입 과일도 증가한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 그동안 포도가격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농가의 실질소득은 감소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농사규모를 늘린 젊은(40대) 농가들이 늘어나 부채가 많아졌다는 것. 농약, 비료 등 생산비 상승과 함께 금융비용도 무시 못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기획재정부와 관세청 등 정부 부처 공무원의 실수로 칠레산 포도에 계절관세를 부과하지 못했다는 감사원 감사결과가 나왔다. 해당 부서에서 금액이 적고 국내 포도산업에 영향이 크지 않았다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계절관세를 부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내 포도 농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변명이 나왔을까. 올해 폭염으로 포도생산량이 줄면서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한여름 폭염에서 포도를 수확하고 있는 포도농가들에게 희소식일까.
청포도 ‘샤인머스켓’
한국의 과수산업은 특정품목에 집중돼 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포도는 캠밸, 사과는 후지, 배는 신고가 전체 재배면적의 70~80%를 차지한다. 맛있는 과일, 다양한 품종을 재배해야 그나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현실은 당장 도매시장에서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품종을 키울 수밖에 없다. 한국산 포도는 캠밸얼리가 대부분인데(80%), 거봉과 머루포도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당도가 높지만 씨가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부터 젊은 포도농가들이 야심차게 품종갱신을 하고 있다. 청포도 샤인머스켓이 바로 그 품종이다. 청포도는 조선시대에도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토종 품종은 재배가 거의 없다. 국내에서 재배된 청포도는 세네카 종으로 알이 둥근 청포도가 유통되었지만, 칠레와의 FTA 이후 국내에 유통되는 청포도는 대다수가 씨 없는 품종인 톰슨 시드리스이다.
이에응하기 위해 씨 없는 청포도 품종인 샤인머스켓을 많이 심고 있다. 당도가 매우 높아 칠레산 톰슨 시드리스보다 훨씬 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샤인머스켓이 1988년에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이기에 한국에서 작물재배 연구를 하고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샤인머스켓에 대한 재배연구를 하지 않고 있어 재배농가들이 일본에서 정보를 얻어 알음알음 키우고 있다.
소관 연구기관에서는 자신들이 개발하지 않은 품종이라며 외면하고 있지만 가격이 캠벨얼리보다 훨씬 높아 재배면적은 꾸준히 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직 가격이 비싸지만 맛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