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길 Dec 16. 2019

인어공주

in 코펜하겐


"Hi"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거리에서 인어공주 동상을 찾아 부지런히 걷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큰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memaid?"

"Memaid"란 단어가 귀에 얻어걸리는 순간,  100킬로그램이 넘어 보이는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뽀얀 얼굴과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다. 무릎까지 꼬깃꼬깃하게 주름 잡힌 얇은 롱코트에 꽉 찬 북유럽 특유의 근육질에 둘러싸인 단단한 몸집과는  거리가 먼 귀여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다리 길이보다 자전거 페달과 안장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무릎을 쭉 펼 수 없었는지, 무릎이 90도로 굽은 답답한 자세로 겨우 올라타고 있었다. 자기 발바닥의 반도 안 돼 보이는 작은 페달은 발을 올리는 것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TV에 나오는 배우 손예진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타야 어울릴 것 같은 자전거였다. 푸른 하늘과 하얀 담벼락에 잘 어울리는, 핸들 앞 쪽에 하얀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였다. 청년의 묵직한 엉덩이에 깔린 자전거는 "끼익 끼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Yap, I'm going. How about you?"

얻어걸린 영어 듣기 테스트처럼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Yap. Hurry up. it's getting dark"

자전거는 한마디 툭 던지고는 쏜살같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 나도 자전거를 빌렸어야 했나?' 바다 쪽으로 꺼지는 해를 따라 사라지는 자전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코펜하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 도로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100년 전부터 자전거 도로를 깔기 시작했고, 지금은 모든 자동차 도로 옆에 자전거 도로가 있다. 코펜하겐에 도착 첫날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 대신 매끈한 아스팔트 위로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녔다. 뒤에서 "따릉 따릉" 비키라는 자전거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그제야 그게 자전거 도로인 줄 알았다.

코펜하겐 역 철길 건너편에 새로 생긴 티볼리 호텔에서 묵었다. 호텔에서 인어공주 동상까지는 4.2킬로미터. 걸어서 1시간 거리다. 시내 무료 자전거를 빌리려고 했다. 인터넷으로 회원가입은 물론, 신분증도 스캔해야 되고, 보증금도 내야 한다는 블로그를 보고 곧바로 포기했다.

이 번 여행을 준비할 때, 스마트폰으로 Pixi 버스표를 구입했었다. Pixi 는 유럽 전역을 거미줄처럼 엮은 버스 노선을 가진 운송 회사의 어플 이름이다. 스케줄이 변경되어 스마트폰 어플과 이메일로 한 환불 요청에 카드 취소 환불은 안된다는 회신을 받았다.  환불 대신 적립한 적립금으로 1년 안에 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취소 환불 정책이다. '버스표 한 장을 쓰려고 여길 또 오라는 거야 뭐야!'

혹시나 현장에 가면 무료 자전거 대여 방법을 물어볼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무인 자전거 자동대여기 앞에까지 꾸역꾸역 찾아갔다. 말 그대로 무인 자동대여기였다. 주위에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호텔에서 유료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었다. 무료가 있는 마당에 유료로 빌린다는 건  내 사전에 사치였다.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지만, 지하철역과 노선을 체크하는 시간이면  걷는 편이 더 빠르고 편할 것 같았다. 코펜하겐을 걸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동상이다."

"생각보다 작다"

"인어 공주가 살 것 같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라 황량한 공장 굴뚝 앞 바닷가에 동상이 있다."

"요란하게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사진 한 장 예쁘게 찍을 수 없다."

먼저 방문한 사람들이 인터넷에 남긴 글들이다. 다시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부정적인 글이 대부분인 인어공주 동상(Statuen af Den lille Havfrue)은 1913년 칼스버그 맥주 2대 회장의 의뢰로 조각가 에드바르 에릭센이 만들었다. 길이가 80cm에 불과하지만 뉘하운과 더불어 코펜하겐의 상징이다.

코펜하겐 방문 인증샷 한 장 정도는 남기고 싶었다. 잿 빛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동상이 어럼풋이 눈에 들어왔다. 인어공주가 가까울수록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무틱한 황 녹빛 인어공주는 금방이라도 하얀 거품 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황량한 바닷가의 초라한 동상 하나는 예술 까막눈을 가진 내 스타일이 결코 아니다. 여느 날이었다면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돌아섰을 나다. 뭉클했다. 이유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나는 인증샷을 찍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바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커플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억새의 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