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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길 Dec 10. 2019

억새의 미래

feat. 명성산 백패킹

밤 8시. 산 정상 바로 아래 억새밭 문턱에 도착했다. 철 지난 억새밭은 주변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듯 우주의 적막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머리에 매달은 헤드랜턴 불빛은 검은 허공을  뚫고 길을 만들어 줬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길이 나타났고, 곧 사라져 갔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어둠 속에 숨어버린 억새가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단풍이 불꽃같은 죽음이라면, 억새는 바람 같은 죽음이다. 흐느끼는 억새 사이로 흐트러진 바람이 콧구멍을 찔렀다. 바람이 사라지자, 검은 허공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촘촘한 별빛이 암흑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새로운 삶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꼴찌로 쫓아오는 서준의 체력이 많이 나아졌다. 11월 명성산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특히 그날 낀 여름 장갑은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기운을 고스란히 전해왔다. 손가락에 온기를 불어 넣기 위해 걸음 속도를 높였다. 찬 바람이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바람에 고춧가루가 섞였는지 콧속이 매워지니 머리까지 아프다. 콧속에 온기를 채우면 좀 나아지나 싶어 넥게이터를 안경 아래까지 치올렸다. 다시 속도를 더했다. 열심히 쫓아오는 서준을  희끗 보았다.

명성산은 높이 921미터.  낮은 산은 아니지만,  들머리가 높아  한 시간 반이면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도 가지고 있다. 작은 키에 몸무게 90킬로그램 가까운 서준은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배낭을 메면 평지에서도 숨을 헐떡헐떡이며 걸었다. 요즘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장비를 하나 둘 모으고, 매주 산에 가자고 보챈다. 백패킹 중독의 초기 증상이지만, 아직 비싼 장비에 손을 대지는 않는 수준이다.

오성급 데크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 10동은 족히 칠 만큼 넓고 반듯하다. 뒤로는 산비탈이 바람을 막고, 앞으로는 억새 바다가 펼쳐지는 전망 좋은 호텔 방이다. 풋프린트를 까는 것이 호사스러울 만큼 반반하고 매끈한 나무 데크에 텐트와 셸터를 쳤다. 후딱 요기를 끝내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아, 이런! 삼각대를 챙기지 않았다. 별 사진을 찍으려면 삼각대가 필수 조건이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손바닥만 한 미니 삼각대 하나 챙기지 않았다. 서준의 체력을 생각해서 내 배낭에  셸터를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그만큼의 무게를 빼야만 할 거 같았다. 삼각대를 배낭에 넣었다 뺏다를 여러 번. 최소한 미니 삼각대는 챙겼어야 했는데 말이다.

데크 난간 위에 두  팔꿈치를 얹어 괴었다. 카메라를 고정하기 위해 팔뚝 삼각대를 만들었다. 팔뚝을 꽉 세운 다음 손목을 꺾은 왼쪽 손바닥 위에 카메라를 올렸다. 조리개 1.4,  ISO 감도 3,200. 셔터 속도는 0.5초에서 4초에 맞혔다. "찰칵 찰칵 찰칵". 별 궤적 사진 촬영은커녕, 사진이 흔들리지만 않아도 다행인 현실이었다. ISO 감도 3,200에는 노이즈가 꽤 심하다는 것을 나중에 보정할 때 알았다.

아침이 왔다. 간밤에 흐느끼던 억새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시골 이발소 바리깡이 군대 가는 청년의 덮수룩한 머리통 한복판을 정수리부터 허옇게 밀어 버리듯, 곱게 닦아 놓은 나무 데크 길은 억새밭을 사방으로 가르고 찢어놨다. 10년 만에 찾은 명성산 억새밭은 예전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억새밭 주변을 따라 데크 둘레길만 만들었어도 되지는 않았을까? 잘기잘기 잘려나간 억새밭은 잘  다듬어진 또 하나의 인공 관광지가 되었다. 억새길 초입에는 억새길 조성에 15억이 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쓴 안내문이 있다. 억새는 제 몸을 검게 태워야  이듬 해에 쑥 쑥 자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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