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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길 Nov 15. 2018

추억을 파는 책방

새한 서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탔다. 단양행 무궁화호 열차다. “저기요.” 하얀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20대 후반 아가씨가 말했다. 창가 좌석으로 갈 테니 좀 비키라는 신호였다. 나는 튕기듯이 일어섰다 앉으며 아가씨를 흘깃 봤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고 눈을 감는다. ‘아가씨 사진을 찍어서 여행의 설렘과 엮어서 글쓰기를 한번 해볼까?’ 꺼림칙했다. 까딱하면 현행범으로 몰리는 세상이다.

기차가 원주역에 멈췄다. 눈을 감았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요.” 아가씨는 내 무릎을 툭 밀치며 기차 복도를 총총히 빠져나갔다. 젊은 여자에게 말 걸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조심스럽다. 내 세월, 너무 늙어버렸다. 기차 스피커에서 무시무시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몰카 행위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단양이다.


새한서점은 헌책방이다. 단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떨어진 적성면 숲 속에 있다. 출발은 서울에서 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 곳까지 떠밀려왔다. 서울의 번듯한 건물에서 폐교된 단양 초등학교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은 여기로 왔다. 삐걱대는 마루와 먼지 나는 흙바닥, 얼기설기 엮은 비닐 지붕, 널빤지를 덧댄 담벼락이 책들을 지킨다. 세월은 이곳에 헌 책 12만 권을 모아놓았다.

서점은 낡았다. 그 많은 책에 놀라기 전에 낡아서 놀랐다. 시멘트가 아니라 흙바닥이다. 군데군데 피워놓은 모기향 냄새와 쾌쾌한 종이냄새에 정신이 몽롱하다. 실내가 침침하기까지 하니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하다.

장르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 속에서 20여 권짜리 <세계문학전집>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잘 알려진 출판사 책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바로 그 책일지도 몰랐다.

<파우스트>,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 <분노의 포도>. 이런 난해한 소설은 금방 책장을 덮게 만들었다. <테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차탈레 부인의 사랑>, <보바리 부인>, <데카메론>. 공부가 싫을 때면 몰래 읽던 소설이다. 에로틱한 소설은 사춘기 호기심을 벌겋게 문질렀다. 세로로 인쇄한 좁쌀만한 글자들이 술술 읽혔다. 마법을 가진 책이었다.

“아이고, 쓸데없는 책을 또 사 왔네." 아버지가 사온 <세계문학전집> 덕분에 어머니가 짜증내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사무실로 찾아오는 책장수 꾐에 곧 잘 빠지셨다. 다섯 평 큰 방은 여러 전집으로 도배됐다.
 아버지는 여행도 좋아하셨다. 토요일 오전 근무가 있던 시절,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방방곡곡을 여행하셨다. 정년퇴직 기념으로 45일 동안 미국 자동차 횡단 여행도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꼭 가고 싶어했던 곳은 개성과 단양이었다. 아버지는 개성에서 소학교를 잠깐 다니셨다. 단양 팔경을 가보질 못했다고 하셨다. 개성은 2008년 시범 관광 때 혼자 다녀오셨다. 다 큰 아들에게 늙은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단양 한번 가자고 보채곤 하셨다. 아들은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 단양에 왔다. 혼자다. 늙은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영원히 쓰러지셨다.

늙은 서점 한쪽 귀퉁이 카페에 앉았다. 테이블은 하나뿐이다. 까딱하면 앉을 자리가 없다. 커피 값은 4000원. 추억을 사기에는 괜찮은 가격이다. 차탈레 부인에 대한 추억 하나,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하나. 아들은 4000원에 추억 두 개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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