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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an 12. 2024

좋은 게 좋은 거?

왜냐하면 그건 원래 그런 거고 그래서 그런 거니까

궁극적으로 볼 때 "왜?"라고 묻는 일에는 너무도 많은 장점이 있기에, 실질적인 단점이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저 "왜냐하면 그건 원래 그런 거고 그래서 그런 거니까" 따위 소리나 하고 있다면 그는 그저 무리를 따라 집단 착각에 빠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집단착각, 80쪽)


(멋모르고 어떤 희망에 부풀어) 내가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선택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이가 자유롭게 크길 희망했다. 그래서 입학금과 출자금 비용이 크고 부담스러웠지만 5살이 된 아이를 공동육아어린이집에 입학시켰다. 어느새 2년을 다녔다. 종종 그곳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만 불편함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좋은 걸 우리만 누리고 있으면 안되는데..."와 같은 뉘앙스의 이야기다. 이렇게 좋은 것! 좋고 나쁨을 경계하는 요즘 내게는 그 말만큼 위험한 발언이 없다. 좋은 걸 우리끼리 누리자고 특권의식을 가지기 위해 공동육아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른 사교육처럼 공동육아하는 것이 비치는 타인의 발언을 들을 때면 혹은 다른 이들의 행보를 볼 때면 별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간다.


다름과 틀림은 한 끗 차이인가. 올해 아이의 졸업을 앞두고 소위장 그러니까 운영위원, 교회의 장로 혹은 권사, 집사와 같은 역할이 주어지고, 작년보다 더 일을 많이 해내야 한다. 무급보수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사회적협동조합이기 때문에 부모 역시 생산자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조합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기 때문에 자꾸 소비자 그저 만들어진 좋은 것들만 누리고 싶고 단물만 먹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니다. 간혹 그럴 수 있다. 내가 출석하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졸업하기 전에 부모 중 한 명이 제일 어렵다는 운영위를 한번씩 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이사, 이민과 같은 삶의 변수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면 조합원으로 있다가 공동육아어린이집의 장단점을 경험하고 떠나게 된다.


이렇게 좋은 걸 우리만 누린다는 발언과 맞먹는 껄끄러운 말은 또 있다. "맞벌이라면 공동육아어린이집 꼭 보내야지"라고 하는 이야기다. 내가 경험하기로는 맞벌이여도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보내기 쉽지 않겠다. 연장보육교사가 있지만 보통 퇴근은 오후 7시 전후다. 그전까진 무조건 아이를 하원시키러 부모 중 한 명은 달려가야 한다. 암묵적으로 오후 6시 30분 정도까지만 아이들이 있고 그 이후엔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다. 맞벌이라면 어느 기관을 보내도 돌봄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한다. 매월 정해진 모임만 2개, 간헐적으로 절기마다 행사가 여러 개 대기하고 있다.


돌아보면 처음 1년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양한 활동이 있다는 자체가 신세계였다. 점점 꾀가 붙으면서 자주 있는 모임이 부담스러워졌다. 공동육아하는 또다른 가정과 친분이 별로 없다면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하는 시점이 온다. 탈퇴사유서만 작성하면 들어갈 때와 다르게 생각보다 손쉽게 나올 수 있다.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다보니 약간의 허점들도 보였다.


공동육아어린이집 면접을 봤을 때 가장 두려웠던 지점은 갈등의 문제였다. 2년을 다니면서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갈등을 경험하거나 목도할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운영위를 꼭 하고 졸업하게 되는 경우, 굳이 알지 않아도 될 내밀한 속사정을 하나씩 배워나가게 된다. 개인적으로 신구운영회에 한번 참석하고 속사정까지 알고 여길 다니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조합원일 때는 운영위회의에서 전달된 내용만을 알 뿐이었다. 역시나 순진했던 걸까. 불안을 조장하거나(?) 굳이 오픈하지 않아도 될 야사와 같은 게 훨씬 방대했다. 운영위 회의에는 교사 대표로 원장이 참석한다. 흘러가는 말로 원장이 뱉은 이야기였는데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운영하는지 약간 추측할 수 있었다. 참고로 공동육아어린이집의 보육교사들도 조합원의 신분이다.


올해 운영위에 들어갔으니 신구운영회에 2번 참석한다. 그곳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어떤 발언들은 집단착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언권이 주어졌을 때, 멋모르고 내 의견을 전달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어떤 생각을 계속했다. 타인의 어떤 발언은 그 현상을 왜곡해서 보게 만들 때가 많다. 그걸 경계하려고 애써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영향을 주고받는다. 말할 때 좀 더 신중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였던 품앗이나 마실 문화도 종종 다른 부모들이 초대해서 아이를 잠깐 봐줄 수 있지만 옛날 시대의 개념과 비슷한 듯 다르다. 내게도 품앗이, 공동으로 하는 육아의 환상이 있었다. 2년 동안 공동육아를 다니면서 환상 대신 현실을 살고 있다. <집단착각>을 읽게 된 이유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다른 부모들의 말에서 걸리는 지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뭐가 다른 것일까. 정말 다른 것일까 하며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지만 집단 안에서는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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