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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Jul 09. 20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

Einmal ist keinmal


그러니 쿤데라가 영원회귀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이는 소설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질문이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쿤데라가 소설 초반에 언급한 영원회귀와 그에 대한 태도는, 이 영원에 대한 포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었더라면, 우리는 그것,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의 무언가를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차피 존재는 무한과 영원 앞에 두 손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원의 공허와 무게를 충분히 인식한 존재에게, 결코 저항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에게 이제 그 영원이란 무엇이 되는가. 그대는 우리가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려 드는가? 왜, 왜 그래야만 하는가.' 영원에 대한 필연적 불가항. 그건 내가 앞서 영원을 우화해야만 했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 전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 中



전편에 니체의 영원회귀를 언급하다간 말이 과히 길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옳았는가. 말하자면 드디어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그 명제에 이르러 종식되고, 바야흐로 우리 존재의 오랜 방황, 존재론적인 방황이 그 명제에 이르러 완결되는 것이었을까. 글쎄, 누가 그것을 선언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니체 그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사변적인 이야기를 덧대어보도록 하자. 모든 존재의 구성, 우주에 널리 퍼져 있는 입자와 원자들이 ‘푸앵카레 재귀시간’을 거쳐 본래의 있던 곳으로 모인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재현되리라고 말하기에 아직도 이르다. 그만한 시간이 지나버렸음에도 말이다. 


물에 퍼진 잉크가 다시금 우연히 한 점에 이르는 그 아득한 경우의 수와 같이, 모든 원소가 우리 우주가 이미 겪었던 특정 패턴의 배열로 되돌아간다면… 그곳은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고, 다시 그 특이점으로부터 우리 우주가 거쳐온 모든 우연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확률은 얼마만큼 더 큰 수로 나누어야 할까. 그러나 그 또한 완전히 불가하다고 선언될 수 없는 한에는, 이 모든 것을 영원이라는 무한히 발산하는 시공간에 던져두면 그만인 셈. 시간이 무한하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 모든 것은 언젠가 한 번쯤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참으로 간편한 장치이다. 이 모든 사유와 고뇌를 겨우 영원이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두 글자로 함축해버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허탈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일어난 것이었듯이, 곧 일어날 모든 것도 이미 일어난 것, 즉 결정된 것이다.’ 영원회귀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라고 생각하던 것, 즉 미래에 대입하였을 때 조금 더 깊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였을 때에만 파괴력을 지닌다. 바로 영원한 시간으로서의 우주 안에는, 우리의 순간이 무한하게 분화하였을 것이라는 인과를 간과하였을 때! 영원회귀의 전제는 안타깝게도, 다중우주론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가능 세계 중의 어느 하나로서. 그렇다면 그것이 미지와 얼마나 다른 무언가인가? 그게 정말 유의미한 추론인가? 


그러므로 그의 말이 그의 의도대로 내게 와닿지 않는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이 모든 순간들이 다시금 재현될 것이고, 그것이 다시금 영원이라는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 끝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그의 말이. 그는 이 영원한 회귀를 마치 무시무시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하게만 느껴진다.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 연속성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원회귀가 참이라면, 지금 내가 이런 범우주적으로 쓸모없는 글을 쓰는 일 또한 반드시 이미 한 번쯤은 일어난 것일 터. 그게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이전 회귀선과 지금 이 순간이 아득한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는 당연한 소리, 누구나 이미 그렇게 행하고 있는 바를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가 영원회귀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전편의 5억 년 버튼이 그러했듯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 사상의 의도와 목적이 아예 다른 곳에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톺아본 영원회귀의 관점이 내 실존과 관계함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의미, 이 순간의 모든 결정과 행동에 있어 지니게 될 위상이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중량’, 즉 이 순간의 모든 결정이 무한히 반복되리라는 공포가 주는 무거움이 아니라, 도리어 가벼운 것이다. 무한히 발산하는 시공간만큼 쪼개고 나누어진 것, ‘더 이상 나눌 수 없도록 가벼운 것’이다. 



1. 쿤데라의 영원회귀  



그러니 쿤데라가 이 사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몹시 이해된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들먹이며 주장하려 했던 바는 ‘이토록 장엄한 실존적 고뇌,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우주적 허무를 이기기 위해 바로 그대가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결정했노라고 이야기해야만 한다!’이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항해야 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뇌해야 한다. 고뇌가 클수록 저항이, 저항이 클수록 극복이 더욱 커다란 의미로 와닿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단한 의문점이 들 수 있겠는데, 그것이 바로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참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프랑스 역사의 자부심도 덜할 것이다. (중략)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등장을 반복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을 보곤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3p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원한 반복이 실존에 있어서의 최대 중량이 되듯이, 한 번뿐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Einmal ist keinmal) 영원히 반복하여 산다는 것이 막중한 무거움이 된 바로 그 원리에 의하여, 단 한 번만 사는 것은 아무런 무게도 가질 수 없는 것이자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쿤데라는 이것으로 서문을 열었고 이것이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사유의 시작점이 된다. 이 ‘존재의 가벼움’과 ‘운명에 대한 태도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텍스트 내에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나는 이하 구분하여 살펴볼 것이다. 


영원회귀가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셈이며, 무한이라는 최대 중량에 압도될 테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한 번뿐인 것이며, 삶의 찬란함과 아름다움마저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쿤데라는 니체와의 대립항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과연 아프리카의 전쟁, 프랑스의 단두대, 히틀러의 학살, 이 모든 부조리함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되겠는가. 그 부조리가 끝없이 반복되고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다면, 혹은 영원회귀의 관점 하에서 이 모든 것을 굽어보고 있다면, 그것이 적어도 사유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겠는가. 허무, 무력함과 염세가 아니고서야. 다음 세계선에서도 이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며, 뜬 눈으로 그 미래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에서는! 


한편 여기에서부터 나의 오독은 시작되었다. “정상참작”, 그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앞뒤 문단의 해석은 천차만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쿤데라가 가리킨 ‘정상참작’이란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냉소이고, 내가 투사한 ‘정상참작’의 본질은 바로 앞 문단에서 언급한 영원회귀적 염세였다. ‘세상사는 그것이 덧없다는 관점,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단 저자에게 있어 세상사에 대한 정상참작은 ‘덧없음’이라는 관점이되, 그것은 곧 사라지는 것, 한 번뿐인 것에 대함이다. 즉, ‘무엇을 어떻게 해도 그것은 일어날 것이고 수없이 반복될 것이다’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어차피 그것은 이미 지나갔고 그렇기에 지나간 것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건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심판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무한히 거듭해서 추궁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냉소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곧 사라지고 말 것을 비난할 수 있겠느냐’는 저자의 질문에 나는 곧잘 호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곧 사라지고 말기에, 우리는 그것을 마음껏 비난하고 심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임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아니 방종은 무엇도 제약하지 못하고, 그것은 비난에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히틀러와의 변태적 화해에 대한 해석 또한 마찬가지. 영원회귀가 없다면, 모든 것은 한 번뿐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을 나는 곧바로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용서와 허용의 주체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가족들인가? 혹은 나 자신, 냉소적인 자기자신인가? 그러나 그 주체를 이웃 인간들에 둔 채로 바라본다면 해석은 미궁으로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가벼움과 무거움에 무관하게 용서와 허용이란 지금 이 순간의 일이고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와 포용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또한 사람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인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중요해지기도 하며, 한편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자신만의 올바름, 그 느낌을 부르짖지 않던가?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라면, 그러므로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든 “키치”(다음 편 주제)의 관점에서 판단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상 저자의 가치관은 운명의 관점에 국한하여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을 일상적 관점, 존재 내적인 관점이 아닌 영원회귀의 안티테제로서 바라본다면 냉소적 허용엔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단 한 번의 선택이 무한히 반복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낳는다면, 그 선택은 신중하게 내려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와 정반대로, 단 한 번의 선택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이기에, 즉 아무런 책임을 낳지 않기에 그 선택은 신중함의 반대편에서 생각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이 단 한 번뿐이라면,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존재 외적으로, 즉 개개인의 관점이 아닌 운명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럴 것이다. 허나 나는 자꾸만 그 문제를 존재 내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하여 그 “정상참작”이 세상사에 대한 냉소(’한 번뿐인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이냐, 염세(’모든 것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이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접근한들 책의 핵심이자 정수, ‘존재의 가벼움’에 도달할 수는 있겠으나 이 글이 비평과 해석의 양식을 따르는 한, 오독을 전제로 나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정 관점에 국한하여 바라본다면 냉소를 이해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일상적 사고관 하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그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텍스트가 수반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1618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분개한 보헤미아 귀족은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담하게도 그의 전권 대사 중 두 명을 흐라친 성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체코 국민 거의 전부를 몰살로 이끈 삼십 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체코인들에게는 용기보다 신중함이 필요했던가? 대답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삼백이십 년 후인 1938년, 뮌헨 회의에 따라 세계는 그들의 나라를 히틀러에게 희생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숫자 면에서 그들보다 여덟 배 우세한 적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도해야 했을까? 1618년과는 반대로 그들은 용기보다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다.그들의 타협은 결과적으로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동안 국가로서의 그들 자유가 결정적으로 상실되는 것으로 결판난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초래했다. 그들에게 신중함보다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체코 역사가 반복될 수만 있다면, 매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여 두 결과를 비교해 보는 것은 필경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런 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추론은 그저 일련의 가정에 불과하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6~358p


이 구절은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전제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뿐인 것은 없었던 것과 같다.’ 중간중간 메타포야 많았지만, 저기 인용 표시가 가리키고 있듯이 이 본격적인 구절은 꽤 후반부에 등장한다.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다. 쿤데라는 체코 역사를 통해 단 한 번뿐인 것으로서의 역사와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한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선택의 순간은 단 한 번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도 결과일 뿐 정답이 아니며, 그마저 시간의 뒤편에 이르러서야 느리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정답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인생의 모든 순간이란 결코 그 올바름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것, 아무리 신중하게 내려진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인들 그것의 참 의미를 확증할 수 없는 것, 즉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다.’ 


동일한 선택의 순간을 반복하여 그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지 않는 한 어느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이 모든 것이 유의미했는지를 알 수란 없기에 우리는 영영 우리 삶, 무수한 선택의 집합으로서의 삶에 있어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는 어느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에 대함, 즉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해함, 미지, 시간이 흘러도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가리킨다. 무엇이 더 바람직했는가, 신중함, 아니면 과감함. 마찬가지 그 외 어떤 주제에 있어서건 그것이 정답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결국 우리에게 있어 세상사는 앎의 문제로부터 믿음의 문제로 열화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개인은 각자만의 믿음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 믿음 안에서 개인의 정신은 보호받는다. 무엇으로부터? 염세, 또는 냉소로부터. 어찌 됐든 이 모든 것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나아가 그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 어제와 오늘 좋았던 것이 내일까지도 좋으리라는 믿음, 약간의 불안과, 그럼에도 어찌 됐든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리라는 믿음,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어찌 됐든 그러한 느낌. 믿음 그것은 개인의 이해와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일 뿐이로되 또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변하고 역동하는 무언가이다. 그것을 정답으로 믿는 것과 그것이 정답임을 아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고 이는 인간에게 있어 꽤 중요한 모멘텀이다. 우리는 그것의 실상을 모르고서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실상을 까마득히 모를 때에만이 믿음이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의미 있다고 믿는 것과 그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지를 아는 것은 아예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의미, 애초 그게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갈구하고, 그게 무엇인지도 다 모르는 채로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에 이 모든 것은 온전해지고, 자신 안에서 그것은 충분히 참이 된다.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모든 불안, 그것이 냉소에서 비롯되었건 염세에서 비롯되었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앎, 그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는 이 믿음을 공격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건 그 사람의 믿음 그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보호하고 있는 경계 바깥의 심연을 두루 들추어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사납게 만드는 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하여 나의 말은 짓궂지만,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는 것. 믿음, 그건 당장 세 합의 문답만으로 ‘어쨌든’이라는 말로 결착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파법이란 참으로 성가시면서 어쩌면 무례한 것이기까지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 하지만 우리가 알고자 하며, 또 닿고자, 혹은 갖고자 하는 바 의미란 적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무언가, 즉 진리이다. 하여 그 어려운 것, 진리란 우리가 진실로 거기 달하여 통하여, 앎으로써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왔듯이 얼마든지 가벼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 우리가 만약 삶을 두어 번 살 수 있더라면, 마치 내 신실한 열망과 믿음으로서의 과거가 지금에 이르러 참을 수 없도록 유치하게 느껴짐으로써 또 한편은 유쾌해질 수도 있게 되었듯이, 모든 삶의 순간에 있어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 우리들은 다시금 되돌아보며 물을 수 있게 된다. 삶, 그 한 번뿐인 것은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이 단 한 번뿐이라면, 그건 정말로 의미가 있는가. 의미란 인식과 앎으로부터 생겨나는 것. 허나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차갑게, 변치 않는 것으로서.  



2. 사족으로서의 자기 서사 



이상은 각자의 가치관, 여전히 각자만의 그 믿음에 따라 얼마든지 답변이 달라지는 질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열심히 풀어헤친 낱말들 앞에, 비단 나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것 앞에 있어서도 당차고 재빠르게 ‘그렇다, 그것은 의미가 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믿는다. 내가 그것을 택하였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렇다, 그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의미란 강렬히 온 것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지금껏 열심히 믿음을 해부하고 비판하였지만,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파헤친 다음 나는 다시금 내게 물어본다. ‘삶이 단 한 번뿐이라면, 그건 정말로 의미 있는가.’ 나는 고심하다가 답했다. 운명적, 존재 외적으로는 무의미한 질문이 될 테고 존재 내적으로서만이 유의미한 질문이 될 것이라고. 삶이 반복되든 반복되지 않든 간에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실존적 질문을 존재 외적으로부터 구상하지 않는다. 허나 존재 내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단 한 번만 행한 것은 아예 행하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한 순간의 선행으로 그 사람이 선해지지 않듯이. 단 한 순간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란,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찰나의 자애감으로 그 사람의 존재가 자애로와지지는 않는 듯이. 지속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장차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존재 내적으로, 존재의 서사 안에서 한 번뿐이었던 것은 없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한 번뿐이었던 그것은 쉬이 잊혀지겠지, 인식의 바깥으로. einmal ist keinmal. 


이쯤 돼서 이 연작의 서론을 다시 한 번 가져와 보자. 내 논리력은 형편없었고, 그 때문에 내 삶에는 제약이 많았다.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닿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감각과 사상으로 내 안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것을 부정하고 경멸했고, 끊임없이 그것을 말살해왔다. 확신, 강렬한 종류의 믿음을 해부하고 논증을 통해 토씨 하나 빠짐없이 부정하여, 다시는 그러한 믿음이 설 수 없도록 부수었다. 그땐 그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거기 수반되는 자기파괴적인 고통까지도. 이것 말고는 그 어떤 것으로도 내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 안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리라는 믿음과 그러므로, 그 상태를 벗어나는 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올바름이라는 믿음. 


내가 내려온 선택들과 그 의미를 강렬히 믿었으며, 그러므로 앞으로 내리게 될 모든 선택에도 똑같이 그러하리라 확신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것들의 실상은 내 믿음과 아주 다른 것이었음이 삶을 통해 드러났고, 그것은 언제나 뒤늦게 오는 것이며, 미리 헤아리지 못한 많은 것들이 방황과 함께 찾아왔다. 믿음, 그토록 강렬하였음에도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그토록 허망하고 가벼운 것. 그렇게나 강렬한 믿음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란, 실은 그 본질이 무의미와 미지와 환상에 뿌리를 둔 까닭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가 그것을 겪기 전에 차마 알 수 있었을까, 지금 느끼는 것 그대로. 


시간은 지났다. 나는 얼마간 그 상태, 부조리한 자기 확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내 친구들아, 이 또한 과거의 이야기이다.)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들은 강 너머 반짝이는 것들의 세계, 야경의 세계에서만 빛나고 있었고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빛무리를 응시하고 있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죽여버린 것은 무엇이지. 내가 없애버린 것은 무분별한 자기 확신이었고, 함께 죽어버린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에 대한 긍정, 자신 自信이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 그것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완벽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알지 못했고, 그러한 사실에 지나치게 천착하며 나 자신을 부정하고 명명백백히 해부하였다. 이것은 이래서 틀렸고, 저것은 저래서 틀렸고… 그러한 것들이 쌓여서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 한 번 개척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이제 그런 해부 작업들은 기억에서조차 지워져 무의식의 저편에 쌓여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발을 떼 나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어야 하며, 다시 한 번, 그것은 그러한 사실과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어쩜 무관한 일이기까지 하다.(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스스로 부추기는 자기에 대한 확신, 믿음이란 실상은 이러한 염세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었으며, 우리는 그 은밀한 손길에 자기 자신을 두어 맡기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의심하는 사람은 그 두 발을 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전편에 이를 두고 ‘우주적 해학’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을 긍정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이미 행해온 것처럼 나를 부정해야만 했을까. 또는, 그 사이 모호한 지점에 남아있어야 했을까. 그대는 내게 무엇이 정답이었노라고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게 추렴할 그 상냥한 말이 그저 또 다른 느낌과 믿음이라면 사양하지. 나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대라면 알려줄 수 있겠는가. 변치 않는 것, 앎 그리고 사실로서, 즉 의미로서… 무엇이 정답이었노라고. 너무 유치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20대 초반에는 이런 정도의 사건들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웅변적으로 굴 수도 있는 것이다.  



3. 맺으며 



니체는 그러한 테마, 믿음의 강렬한 허망함이라는 인간 본질을 영원이라는 웅변적인 제재로 상기시켰고, 결국 말하고자 했던 바는 자기결정적 태도에 있었음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야 한다, 그 결과까지도!’ 믿음이 그 뿌리를 내리는 바 의미란 허망한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것은 자신의 결정으로 짜여야 한다. 이는 키치(다음 편 제재)라는 주제와 결부되며 그 양상을 비극적으로 확장한다. (우리는 니체가 키치에 희생당함으로써 벌어진 역사적 비극을 알고 있다.) 


내 태도가 들쑥날쑥하여 모호하셨겠지만, 나는 그가 결론을 상기시키기 위해 채택한 제재, ‘무한히 반복하는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제재에 크게 동하지 못하였을 뿐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 하지만 재밌기도 하지, 이 또한 앞서 열심히 피력한바 믿음의 역설이다. 그의 말을 톺아보기 전에 나는 먼저 그 말의 웅변적 특색에 감화되었었고, 곧 있어 그 말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여러 문건을 톺아보았더니만 일전의 믿음은 온데 간데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거, 만물은 동일한 수순으로 반복될 것이다’라. 이게 다 뭐람. 지금 이 순간 선택하는 모든 것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그러라지. 원자가 분해되고 다시 재조립되는 판국에 기억이나 있을 것이며, 인식이나 있을쏘냐.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곧이어 다가올 모든 미래가 이미 일어난 것으로서, 결정된 것으로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리라고? 그러라지. 미래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였을 것이며, 그 중의 어느 하나로 올 것이다. 개중 무엇으로 오는지를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은, 미지와 같다. 차라리 그러한 것에 실존이 발목 잡히어 고뇌하느라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 그것이 우주적 해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상 열심히 설하여봤자, 이 또한 나의 믿음이겠지. 


한편, 이 주제에 있어 내가 아리송한 반문을 제기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반론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쿤데라 또한 그랬던 것이다. ‘삶이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전제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 번뿐이기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뿐인 것은 없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다가도 마찬가지로 나는 비판하였다. 니체건 쿤데라건, 나는 존재 외적으로, 딱히 내 실존과 즉각적으로 관계하지 않는 방식으로는 그 말을 곱씹지 아니했다. 실로 그 모든 것이 한 번뿐이라 무의미하였더라면, 그러한 인식이 또한 크게 의미 있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히틀러와의 변태적 화해가 냉소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에는 크게 동의하지 못하겠다. 삶은 현 존재에게 귀속된 것이다. 아니, 애초에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외적인 관점으로 형상화하였을 뿐이로되, 우리가 그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가. 삶은 존재의 시간이다.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쏟아지듯이 다가오고 있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미 있다고 여겼던 그 믿음만이 가변하였을 뿐.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라, 참을 수 없이 가벼이 흩어지는 먼지와 같이 사라져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한 번뿐인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 인식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변하는가. 변한 것은 인식과 믿음뿐. 우리는 주어진 의미로써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써 살아가고 있었던 것.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믿음이란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시간에 따라 그 믿음의 가부만이 쌓여갈 것이다. 한편 아주 엄밀히 비판하자면 말이야, 우리가 삶의 의미를 영영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시간을 따라 쌓인 믿음의 가부 또한 마찬가지가 되어 있다. 무엇이든 우리는 선택하였고, 알 수 있는 것은 그 결과이지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인간에게 남는 것은 믿음과 좌절, 그리고 또 다른 믿음뿐이다. 내가 니체의 결론에 동의한다고 하였지. 그러하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것, 그것이 바로 나의 것이며, 그 결과까지도 모조리 나의 것이다. 그것이 유의미해서가 아니라, 즉 내 바깥에서 그것이 참되다 여겨진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존재 내적으로 끌고 와 이해한다. 쉽게 말하자면, ‘네 지금 이 순간의 선택들이 반복됨으로써 네 미래를 미리 결정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든지, ‘허나 네가 단 한 번만 선택한 것은 그것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든지. 굳이 이번 생이 아닌 다른 것을 가져오지는 않는 방식으로. 하지만 니체에게 그러했듯이 쿤데라에게도 마찬가지 태도를 견지한다. 그가 전제로 끌고온 것, ‘히틀러와의 냉소적 화해’라는 제재에 동의하지 못하였을 뿐,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에 나는 동의한다. 이건 다음다음 편쯤에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오늘은, 여기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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