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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Sep 08. 2024

[Review] 우리는 또 만나고...

연극 일기 - '오슬로에서 온 남자'



우린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만나고, 
또 만나고… 

- 연극, 오슬로에서 온 남자 中


8월의 마지막 날, 토요일, 연극을 보러 혜화에 갔다. 그전에는 머리를 깎으러 안암에 들렀다. 지금 사는 곳은 이태원이지만, 나는 아직도 머리를 하러 안암으로 간다. 헤어 스타일도, 미용실도 딱히 대학 이후에 새로운 시도를 해본 일은 없다. 변화보다는 안정,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에 머무는 내 성향. 내 헤어 스타일은 10년째 같은 투블럭이다. 머리를 짧게 유지하기 때문에, 2주에 한 번씩은 안암에 들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말 일정의 틈새마다 동선과 시간을 어렵사리 마련해야 한다. 


번거로운 일이다, 머리를 하러 40분이나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은. 언젠가부터 굳이 이러한 사실을 주변 ‘지인’에게 알리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야?’ 고-맙게도 날 대신해 갑갑함을 느껴주는, 사람들의 오므린 눈썹을 마주 보아야 하며 설명한들 이해시키는 데에 번번이 실패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 열심히 설명하기에 그다지 대단치 않은 일이기도 할 테고… 번거로움, 그럼에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변화를 싫어하는 내 성향 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움과 추억 때문이다. 


서울은 남의 동네, 내 고향은 대구 경산이다. 서울은 영영 남의 동네, 아무리 살아도 연고지가 될 수 없는 이 도시는 자주 외롭다. 나도 동네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은… 가끔, 아니 실은 자주 생각한다. 머무르고 거쳐 지나온 동네가 많다. 안암동, 제기동, 월곡, 왕십리, 회기, 청량리, 그리고 지금 이태원 밑의 보광동. 가끔 들른들 불러볼 동네친구라곤 없지만, 대신하여 머무른 시간만큼의 추억이 골목에 짙게 서리어있다. 나는 돌아온 거리의 적당히 후미진 곳에 잠깐 멈추어, 담배를 피우면서 그때그때 되살아오는 과거를 흠향한다. 살았던 시간의 기억이 ‘형제집’과… 제기동 하숙촌 오래된 붉은 벽돌 곳곳에 베어 있고 경희대에서 고려대로 넘어가는 언덕길과 다람쥐길, 홀로 거닐었던 그 수많았던 밤거리와 한때 친하였으나 결국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몰고 온다. 작은 방, 내 기억만으로는 다 꺼내어볼 수 없는 시절들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의 나와 내 얼굴과 그때 내 안을 전전했던 고민, 이제는 사라진 그 고민들이 되살아나며, 나는 어딘가 애틋한 상실과 이별의 달콤함을 느낀다. 



흘러가 버린 그때 그 시간들은 동네의 정취와 상점의 간판 속에 길이 남는다. 그래서 건물과 상가가 바뀌는 것은 유독 커다란 상실처럼 다가온다. 기억은 유한해서, 이정표가 없이는 결국 먼 언젠가 증발할 것임을 생각하는 까닭이다. 오늘도 안암에는 하나의 상점이 문을 닫고, 벽과 인테리어를 허물어 초라한 잔해로 남고,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더불어 영영 과거로 사라지고 있었다. 제 차례를 맞아 떠나가야 할 것들이 떠나가고 있고, 나는 어딘가 애틋한 상실과 이별의 달콤함이라는, 이상하게 얽어진 감정을 느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순된 감정.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원장님은 아무 말 없이 바리깡을 드신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주 흡족하고, 심지어 우쭐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 이게 단골의 맛이지’ 같은. 원장님은 요즘 내 고민을 훤히 꿰고 계신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도통 그 속을 알 수 없어 갑갑하던 참. 다가가면 조금 멀게 느껴지고 멀어지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가까워오는, 그보단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 크게 반응하는 내가 답답한 요즘. 원장님은 익숙한 손길로 숯 가위질을 하시며 내 눈동자를 바라보곤, 무심한 듯 속 깊은 의견을 건넨다. 나는 그 시간이 참 좋다. 그리고 언젠가 먼 언젠가, 예외 없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 미용실도 문을 닫게 되고, 인테리어를 뜯어내 휑해져 버린 회백색 건물 잔해를 바라보는 날이 오겠지. 기억보다 먼 과거로 떠나버리는 날이. 




273번 버스를 타고 혜화로 건너간다. 공연 시작 15분 전쯤에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그날 하필이면 대학로에는 ‘차 없는 거리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버스는 혜화를 한참 지나 종묘 근처에서 멈추었고, 황급히 극장을 찾느라 거리를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대낮의 혜화에는 앞뒤로 차들이 들어서지 못하게끔 바리케이드를 둘렀고, 그 가운데에는 플리마켓 몇몇과 아이들이 뛰놀 수 있게끔 물놀이 행사장이 들어섰다. 축제를 맞아 평소보다 더욱 붐비는 사람들을 뚫고,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지상을 뒤로하며 대학로 예술극장,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오슬로에서 온 남자’는 총 5개의 단편이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극이다. 첫 번째 단편의 무대가 조용히 밝아왔고, 등산 복장을 한 중년 남녀 한 쌍이 무대 위에 소붓하게 앉아 있었다. 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다간, 수년 만에 한국의 어느 등산로에서 재회한 참이다. 적당한 어색함과 그럼에도 다 숨기지 못할 반가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미묘하면서도 과감하게 줄타기를 하는 데 그 천연스러움에서 완숙미가 풍긴다. 


연극만의 매력이랄 게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배우들 저마다의 말맛을 음미함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 연기만으로 적막한 무대를 채우고, 목소리를 통해 우리를 지금 이곳 텅 빈 무대가 아닌, 저 너머 어딘가로 이끄는 존재. 연극의 즐거움은 겨우 몇 가지의 소품, 그리고 오직 배우의 힘만으로 캄캄한 극장을 상상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그 마력에 달려있고, 거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목소리가 가지는 힘과 설득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배우의 신호에 이끌리는 존재인 한, 각 배우의 말맛을 음미하는 것은 모든 관객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일인 것이다. 


배우의 딕션은 정확하고, 발성은 단단하다. 나아가 그 맛에는 농후함이 베어 있었다. 중년 남성 배우의 묵직하고도 유쾌한 목소리와 마찬가지 중년 여성 배우의 경쾌한 소프라노 톤 음성, 소리쳐 말하지 않아도 객석을 든든히 채워 들었다. 연기 내공이 느껴지는 잘 갈무리 된 목소리의 정갈함,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가 실어 나르는 대사는 시종 자연스러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좋은 배우와 좋은 극본, 나는 벌써 좋은 연극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배우의 눈과 손끝이 향하는 대로 우리는 향하고, 각자의 심상이 허락하는 최대한도로 가슴 속에 저마다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가슴 속에 그리고, 또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각 다를 것이다. 남성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며, “아, 그래, 거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거기 좋았지.”라고 말했다. 나는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읽으며 미리 그려두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저 남자가 가리키는 허공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섯 개 단편의 줄거리를 하나하나 읊어보기에는 내 기억이 짧다. 노트를 챙겨가는 것을 깜빡한 탓이다. 대신하여 이 단편들을 어우른 전체적인 분위기와 극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요약 소개하는 것으로 후기는 대체해야겠다. 굳이 내가 서론에서 ‘이별의 센티멘털’을 거론한 까닭. 이 극은 우아한 이별과 상실, 그 앞의 쓰고도 달콤한 오묘함의 정서를 공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관람하는 입장으로서는, 맛있기 그지없는. 


첫 챕터 ‘사리아에서 있었던 일’은 두 중년 남녀가 못내 각자의 길을 향해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두 번째 챕터 ‘해방촌에서’는 아버지의 서사와 추억이 어려있는 해방촌 어느 원룸의 마지막 노을 앞에서. 세 번째 챕터 ‘노량진’에서는 사라져 가는 유년의 노량진 골목들과 미군 부대와의 추억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때 그 서사를 반추하는 담담함에서. 네 번째 챕터 ‘오슬로에서 온 남자’는 죽어버린 ‘욘 크리스티안센’에 대한 추모와 그가 끝내 만나지 못한 생모 앞에 쓴 편지, 그를 낭송하며 아련하게 떨려오는 목소리 끝에서. 다섯 번째 챕터 ‘의정부 부대찌개’는 할머니의 차례날, 어머니를 떠나보낸 자식들과 자신을 거둬준 할머니를 떠나보낸 어느 베트남 여인의 유쾌하게 비어 있는 넋두리를 통해서… 극은 여러 가지 이별과 상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만남과 이별의 정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언제나 가슴 깊숙이 찌르고 머무는 것. 하지만 연극은 그 정서를 절제해 세련미를 돋보인다. 감정에 넘침이 없도록 잘 조율한 대사들은 매끈한 구어체로 마련되어 있었고, 배우들은 진득한 말맛을 버무려 무대 위에 실현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별은 우아했고, 달콤했다. 


연극을 소개하는 시놉시스에서는 본 극의 주제의식을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이들의 이야기’, 즉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언급하였지만, 나는 딱히 그러한 무드와 의식에 젖은 채 극을 관람하지는 않는다. 그건 어쩌면 나 또한 경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내 심안에 철컥하고 걸려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꽤 익숙한. 


그보다는 잘 구성된 ‘사람 사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담백하기에 푹숙하니 젖어들었고, 리얼하기에 완전히 설득된, 그런 사람 사는 이야기. 왜냐하면 사람 사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끝내 만남과 이별의 서사로 분기처리 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에 무작위로 주어지고 또 펼쳐져 있는, 전혀 연속되지 않는 사건들은 끝내 이별로 그 챕터를 매듭지은 채, 개인의 서사로 편입돼 갈무리되는 것. 우리 삶이라는 이야기가 내포하는 속성도 그렇지 않을까. 


한 개인에게 있어 이별과 상실은 오로지 아픔이었던 사실을 넘어,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동안 점차 익숙해짐으로써 점차 담담히 포용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별로써 매듭짓고 갈무리 되는, 한 가지 서사의 종막. 연극이 끝나고 상실의 체험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기억하는 이별이 더욱 많아지는 만큼 우리가 받아들일 이별이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게 극은 그렇게 다가온다. 충분히 성숙된 이별의 우아함, 상실 앞에 담담히 서 있는 사람의 표정, 그때 그 침묵 안에 가로놓인 아련함만이 선사할 수 있는 감미로움. 





잠깐 내가 거쳐온 집들을 세어보았다. 지금 살고 있는 보광동 투룸은 상경하고 6번째 집이구나. 보광동은 재건축이 확정되었다. 내가 위치한 2구역에는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바로 접붙어 있는 3구역은 이미 이주를 마쳤다. 사람의 흔적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동네에는 고양이와 비둘기로 가득하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던 슈퍼마켓과 그 대로변에 줄지어 서 있던 배달 오토바이들, 종종 들르던 식당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고, 거주구에는 ‘공가 세대 출입 금지’의 노란색 경고 스티커가 하나 빠짐없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워낙 낡고 오래된 동네라서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좁다랗고 가파른 골목 골목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키넘이로 자라나 있다. 퇴근하고, 운동을 마친 다음 늦은 저녁 그 길을 거꾸로 되짚어 집으로 온다. 나는 이미 끝이 정해진 채 다가오는 이별을 바라보고 있다. 약간의 상실감은 발소리를 따라, 사람이 사라진 적막한 길 위로 흩어진다. 


오늘은 이별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한때 그토록 가까이서 웃었으나 이제 어디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어져 버린 이들.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과의 이별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매달려 있음을 기억한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모습으로서 오지는 않겠지. 심지어 먼 훗날 내가 다시 만날 그 사람은 네가 아닐 것이다. 대신 널 닮은 누군가의 얼굴 속에서, 네 흔적을 읽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삶 또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 우린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만나고, 이별하고… 또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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