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식 Jan 14. 2023

나는 블라인드를 지웠다

나는 블라인드를 지웠다


요즘엔 내가 인사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 후회 될 때가 많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위해 이러고 있을까.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업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일을 하면 할 수록 이런 생각이 더욱 들고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건 이것이 내가 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일 자체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건 아마도 블라인드라는 앱 때문인 것 같다. 최근 블라인드 앱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블라인드가 나의 일을 절망으로 만들고 있다. 


블라인드는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 앱이다. 회사 이메일 계정을 인증해야만 가입할 수 있는 폐쇄적인 커뮤니티이자 한국의 모든 직장인들이 가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직장인의 최대 커뮤니티이다. 그리고 최근 많은 이슈를 만들어낸 커뮤니티 중 하나이다. 모두가 아는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부터 KBS 직원 연봉 1억 사건, 국민은행 불륜 사건 등이 이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졌다. 이불 속에서 하는 일도 안다는 옛 말이 이 앱을 통해 증명되었다. 사내에 아무리 작은 비밀이라도 이 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애환과 독기 모두 블라인드를 통해 해소되고 있다. 


블라인드에는 익명성과 폐쇄성이 있다. 사실 인터넷의 모든 커뮤니티가 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익명성과 폐쇄성은 보다 진솔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지만 그 안온함 뒤에 숨어 무분별하게 타인을 비방하는 역효과도 불러 일으킨다. 난 이 두 특징의 부정적인 요소가 블라인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유독 블라인드에서 이 때문에 많은 문제가 나타난다. 


블라인드 앱은 크게 두 가지 게시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회사 직원들끼리만 글을 볼 수 있는 사내 게시판과 다른 회사 직원의 글도 볼 수 있는 사외 게시판이다. 앞서 말한 유명한 사건 사고가 블라인드 앱의 사외 게시판을 통해서 알려졌다. 앱에서 유일하게 공개되는 정보인 회사명을 방패 삼아 현직자들이 직접 내부의 비리나 여러가지 악행들을 그 게시판을 통해 알린다. 이는 공익을 위한 제보이기도 하지만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자극적인 소문들을 모두의 가십거리로 공개하는 처형 이기도 하다. 이 게시판의 두 얼굴은 사내 게시판이라고 다를바는 없다. 블라인드엔 가해자 없는 피해자만 존재한다. 


사내 게시판은 주로 회사에 대한 불만이 토로되는 자리다. 직장인들의 영원한 적인 경영진들에 대한 쓴 소리가 주 토론 거리다. 새롭게 제정된 회사 방침이나 제도, 평가와 급여 등에 대한 자유로운 비난과 비판이 게시판을 채운다. 하지만 같은 근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게시판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방침과 제도를 만들고 평가와 급여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인사팀은 그 게시판의 단골 손님이다. 


블라인드에서 인사팀은 근로자들의 공격 대상이자 공공의 적이다. 누구도 그 조준 사격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근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올해 연봉 인상률이 적거나 평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블라인드에는 인사팀 욕이 올라온다. 공지사항에 새로운 방침이나 제도가 게시되어도 어김없이 인사팀 욕이 올라온다. 내용은 모두 한결 같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않고 근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지를 안하면 안한다고 욕을하고 공지를 하면 공지를 한다고 욕을 한다. 그런 글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했다. 그들은 그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과 같은 근로자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닐까?


인사팀은 근로자다. 이는 인사팀이 근로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자신들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본인들 또한 근로자인데 근로자들을 위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의 모든 일이 전부 근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이는 회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도 완벽한 존재가 아닌데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회사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는다. 회사가 정하고 만드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해야 하고 정확해야 하고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그것이 본인들의 생각과 다르면 익명성과 폐쇄성 뒤에 숨어 글을 쓴다. 글 끝의 화살촉을 모두 인사팀에게 조준한다. 


모두 각자의 역할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는 비난을 받는다. 이 명제는 인사팀에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꼬리표다. 하지만 블라인드는 그 꼬리표를 너무나도 적확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는 건 그 사실 자체만으로 힘겹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다. 누구 말 마나따나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지시를 잘 따르는게 내가 서명한 근로계약서의 내용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오른다. 물론 내가 아이히만에 대변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악이란 정말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그 사실에 더욱 공감한다. 블라인드에 인사팀에 대한 욕을 올리는 사람들이 모두 천에 악한 범죄자나 악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다 오히려 자신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람들도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입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그저 근로자들을 위한 앱인 블라인드를 다시 설치하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