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5
한동안 매우 바쁘게 지냈다. 회사일로 바쁘게 지냈다는 핑계가 식상할 때도 됐지만 정말 그것 말고는 바쁜일이 잆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 일에 빼앗겼다.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나니까 빼앗겼다는 표현은 맞지 않으려나. 회사는 내게 돈을 주지만 그 댓가로 시간을 가져간다. 때로는 내가 사인한 시간보다 더 많이.
회사에 다 주고 남은 몇몇의 시간들을 쪼개고 쪼개서 나의 일상을 돌본다. 친구들을 만나고 내 인생의 미래를 계획하고 나의 과거를 돌아보며 내게 부족한 것들을 더욱 채웠다, 는 꿈같은 이야기다. 대부분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핑계로 술을 마시거나 육체적 피로를 핑계로 누워있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 어제도 야근했잖아.
바람직하지 못한 내 모습을 대변하는 일에 회사 핑계를 대는 건 꽤 효과적이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루거나 본인의 피곤함을 토로할때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큰 의심은 받지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이유로 약속을 미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밥벌이기 때문일까. 당연히 후자일 거라고 생각한다. 밥벌이는 신성한 것이다.
근데 이 조차도 나를 대변하기 위한 변명으로 느껴지는게 요즘의 내 고민이다. 신성한 밥벌이를 입 버릇처럼 들먹이며 내 모습을 감추고 스스로 위안 삼는게 내가 보기에도 구차하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가 내 입 버릇이 되어 오히려 일이 바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를 지속적으로 감추고 핑계되기 위해 오히려 회사에 나를 더 가두어 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회사가 꼭 핑계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 소망이기도 했다. 내 위치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했다. 매일 같이 밀려오는 일을 앞장서 처리하며 야근도 불사했고 상사와의 관계를 위한 회식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다. 난 이걸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욕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나를 회사 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거라고는 생각하지 몰랐다. 난 이제 회사에서 잘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람이다.
언젠가 내가 존경하는 부사장님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초고속 승진, 최고의 대우, 높은 지위와 권력. 회사에서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자리이자 사람이었다. 그 분과의 저녁식사는 늘 영감이 되었고 많은 가르침을 주는 좋은 자리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내 인생안에 회사가 있는 것이지, 회사 안에 내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이지만 그동안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부사장님 만큼은 나와 같은 핑계를 대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 위치에 그 사람이 되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해야 하고 모든 사회생활에 배제되어선 안된다고 말해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결국 내 인생이 올곧아야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2년의 시간이 스쳐간다.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후 오직 회사만을 바라보며 임원이 되고자 노력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물론 아무 소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인생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회사 안에서 더 발버둥 칠수록 내가 원하는 자리에 가는 더 빠른 방법은 내 인생을 더 돌보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을 돌보는 일을 생각한다. 야근과 회사를 핑계로 수 없이 거절했던 가족들과의 저녁식사와 친구들과의 약속을 떠올린다. 회사가 내 인생보다 더 큰 것처럼 핑계를 대던 지난 날을 반성한다. 회사가 내 인생을 대변해 주진 않는다. 내 인생의 대변인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