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지노라는 예술
빈지노를 처음 알게된 때가 생각난다. 나는 빈지노를 고등학생 시절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가장 잘나가던 래퍼가 빈지노 였다. 그리고 힙합을 사랑하던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궁금한 래퍼 또한 빈지노 였다. 그때 내 친구가 빈지노를 알려주며 했던 말은 아직도 잊지 못할 만큼 인상적이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래퍼 빈지노 몰라? 스냅백에 백팩 메고 랩하는 서울대 출신 있잖아”
빈지노는 첫 등장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큰 키에 준수한 얼굴, 이른바 ‘남친룩’ 의 정석인 패션 센스와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그의 학력까지. 그의 모든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유독 그의 외적인 모습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가 랩을 못하는 것도, 음악이 힙합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외모에 더 관심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당시 대중에 퍼져있던 힙합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당시 힙합 음악은 거칠고 빡센 이미지가 더욱 강했다. 그런 힙합 씬에 빈지노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 맞다. 나 또한 빈지노를 좋아하게된 계기에 그의 외적인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이미지에 가려진 그의 음악이다.
빈지노는 기존 힙합들과 늘 조금씩은 새로운 음악을 했다. 기존엔 없던 가사, 기존엔 없던 멜로디, 기존엔 없던 플로우, 기존엔 없던 사운드 들을 마구 섞어서 그만의 음악을 했다. 센세이셔널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힙합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진 않았다. 하지만 힙합이라는 장르의 틀에 맞추기엔 그 모양이 맞지 않았다. 그의 음악이 늘 힙합보다 컸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빈지노는 이름이 알려졌을 때부터 힙합 정체성과 늘 싸워야 했다. 빈지노는 힙합이다, 아니다. 빈지노가 랩을 잘한다, 못한다. 웃기지도 않지, 도대체 힙합이 뭔데!
난 오히려 빈지노가 힙합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의 태도와 삶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힙합이라는 장르는 유독 다른 음악 장르보다 음악적인 특성보다 그 태도를 중시하는 장르다. 단지 베이스 기반의 비트 위에 랩을 하는 것이 힙합이 아니고 한 아티스트가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어떻게 음악활동을 전개 하는지, 그것이 ‘힙합’ 이라고 할 수 있는지가 유독 중요한 장르다. 힙합 팬들 사이에 누가 진짜 힙합이고 누가 가짜인지 가리는 행위는 힙합이란 장르가 있던 때 부터 늘 있어온 논쟁이다. 난 이걸 부정적으로 본다. 이 논쟁은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성질이자 선민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힙합이 뭔데!
나도 힙합을 좋아한다. 힙합이라는 음악에 담긴 메시지와 그걸 통해 바라보는 세상, 삶에 대한 태도를 동경한다. 그런데 그런 잣대들을 마구 세워가면서 누구는 힙합이냐 아니냐, 진짜냐 아니냐를 따지는 행위에는 반대한다. 힙합을 좋아하는 우리가 떳떳하게 힙합의 태도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팬이든 아티스트든 그 누구도 이 명제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살지 않는다고 해도 꼭 그래야만 힙합을 하는 것인가? 사람이 가진 다양한 생각을 한 형태로 표현하게 해주는 것이 음악이자 예술이다. 힙합은 그 형태 중 하나고. 근데 그런 태도로 아티스트를 재단하고 평가하는게 맞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오히려 비 힙합적인 태도다. 그리고 그 논란의 대상이 늘 빈지노였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킨다. 빈지노가 힙합이 아니면 뭔데!
삶의 태도를 본다면 빈지노 만큼 힙합인 사람이 없다. 그는 누가 뭐래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만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재미없거나 따분한 음악은 그게 힙합이라고 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늘 자신을 증명하고 개선하고 발전해왔다. <어쩌라고> 라는 트랙에서 IDGAF 의 정신을 얘기하기도 했고 <Born Hater> 라는 트랙에선 키보드 워리어들과 음악 얘기를 왜 해야 하는지 그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을 힙합이 아니라고 욕할 수 있나? 틀에 갇혀 사는게 지겨워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힙합이라는 틀을 만들어 자꾸 그곳에 가두려 하는 행태가 힙합인가? 이게 힙합이라면 난 이제 더 이상 힙합 팬이 아니다.
얼마 전 발매된 빈지노의 ⌜노비츠키⌟ 앨범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이전 앨범들에 비해 귀에 쏙 박히는 라임이 없다던지, 신선한 사운드가 없다던지, 박수를 칠정도로 기막힌 플로우가 없다는 말들 말이다. 그의 앨범이 힙합 앨범이 아니라는 의견도 보았다. 그런 말들을 보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제 나도 빈지노가 더 이상 힙합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버린 것이다. 빈지노는 힙합이 아니다. 예술이다.
이제 그는 힙합 아티스트가 아니고 그냥 아티스트다. 이전에도 그런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 앨범을 통해 더욱 확신했다. 그리고 앨범에 대한 반응들을 보고 더더욱 확신했다. 빈지노는 한국 힙합 틀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티스트가 되어버렸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이전 그가 발표한 트랙들과 유사한 곡들이 단 한개나 있을까? 많은 팬들은 그 지점을 실망했지만 나에겐 그것이 빈지노가 예술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전에 해온 성공 방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빈지노 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늘 새롭고 늘 뻔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꿋꿋이 하는 태도가 정말 멋있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부터 빈지노는 나에게 예술 그 자체로 다가왔다. 비록 그가 시작한 음악 장르는 힙합이었을지라도 그 경지를 예술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빈지노는 힙합계의 평경장이다.
빈지노의 말과 행보 하나하나가 나에게 영감을 준다. 한 인물에게 이토록 빠져서 그 사람을 탐구하고 생각하고 응원하고 팔로우 하는 것이 이 이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늘 모든것에 간헐적으로 중독되는 나지만 빈지노에게 만큼은 언제나 중독되어 있다. 빈지노가 이 예술을 멈추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짧은 삶이지만 그 삶동안 그의 예술과 그 예술을 통해 얻는 나의 영감이 계속 되길 바란다. 그래서 이 글은 예술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