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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암동 나그네 Nov 29. 2018

내일도 미생이겠지만

#01 후배가 회사를 떠났다.

"관둔다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연차에 벌써 후배를 붙잡아야만 하나"였다. 억울했다. 이제 4년 차인 조무래기지만, 벌써 회사를 떠나는 후배를 붙잡아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게 서글펐다. 후배들 앞에서 '에헴'이나 할 줄 알았지,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네들과 똑같이 헤매고 방황하고 어떻게든 하루를 넘기는 사람인데.

점심시간에 떠난다는 사람을 불러다 만나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사무실을 나섰는데, 불현듯 예전 생각이 났다.

2년 차였던가. 수습기자 시절, 교육을 혹독하게 해 우리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A 선배가 회사를 떠났다. 당시 나는 국회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같은 팀 선배가 A를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갈 건지 의사를 물었다.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작은 호프집 2층 구석진 테이블에 다 같이 모여 앉았다.

A 선배는 처음 나를 보고 흠칫하더니 내 쪽으론 얼굴도 잘 돌리지 않았다. 난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며 같은 팀 선배와 A 선배의 대화를 들었다,

아니, 사실 대화는 아니었고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웠다. "내일 다시 만나는 거로 알고 있겠다.", "뭐가 불만이냐, 해결해주겠다.", "그래도 거기는 아니다. 우리 다시 잘해볼 수 있다." 팀 선배는 공수표를 마구 날리기 시작했다. 떠나는 연인을 붙잡을 때 쓰지만, 효과는 전혀 없어 고리타분하기만 한 멘트를 촉촉한 눈빛에 실어 날렸다.

이윽고 모두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와 A 선배만 남았을 때, A 선배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보라고.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지.

"아니, 선배는 회사가 싫어서 떠나는 건데 왜 우리가 붙잡아야 해요? 우리는 잘 못 한 것도 없잖아요. 회사에 불만이 있으면 같이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왜 도망가시는 거에요. 그리고 도망가시는 선배를 저희는 왜 퇴근하고 피곤한 몸으로 여기서 다시 붙잡아야하고." 

어차피 자주, 아니 거의 안 볼 것이라 생각해 질러버렸다. 그때 A 선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무섭다. 너"라고 하고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소리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던 거 같다. 자기가 눈물이 많다며 자꾸 울려고 하는 팀 선배를 보는 것도 화가 나고 무엇보다 퇴근하고 쉬고 싶은데 왜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리 구질구질한가 싶었다. 저런 식으로 후배를 붙잡진 않을 거라고 침대에서 생각했었다.

회사 인근 카페에서 사표를 던진 후배를 만났다. 후배가 생각하는 기자 인생과 내가 생각하는 기자 인생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가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내가 '기자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일장 연설이었다. 금융을 전문 분야로 삼아 깊이 파 보고 싶다는 미래를 밝힌 후배에게, "기자에게 전문성은 이미 없어. 아무리 공부해도 취재원보다 잘 알 수 있겠어? 우리에게 남은 건, 대중들 대신 정보를 연결하고 그들의 말을 가까이 듣는 것뿐이야"라며 아는 척 했다.

겨우 1년 차이. 알면 뭘 얼마나 더 알겠나. 그런 내가 기자에 대해 논하고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평가하고 재단했다. 열심히 분석적인 척, 쿨한 척, 인생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척했다. 구질구질한 건 안 하기로 다짐했으니까. A 선배를 보냈던 그때 호프집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후배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 돌이켜보면, "가지 말고 같이 일하면 안 되겠니." 한마디는 해야 했다. 구질구질하게 굴었어야 했다. 짜증도 내보고 회유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눈가에 눈물을 훔치며 자꾸 매달리는 건, 구질구질 한 게 아니라 용기였는데. 나는 그럴 깜냥도 안되는 선배였다. 좋은 선배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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