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한 Mar 30. 2019

03 : 딤섬과 필름하우스 그리고 각자도생(2)

잔잔한 듯 뜨겁게, 타이베이

“이제 뭐 할래?”

질문을 듣자마자 말을 꺼냈다. 

“따로 놀자.”

언니에게 설명했다. 각자 가보고 싶은 곳에 가서 놀다가 이따 저녁에 만나자고. 


실은 이건 내가 해보고 싶었던 새로운 테마 여행 방식이었다. 같이 가서 따로 놀고 다시 만나는 일명 ‘따로 또 같이 여행’인데, 처음 생각한 건 몇 년 전이었다. 친한 친구 둘과 어디든 가서 그렇게 놀아보자고 계획했었다. 


A는 유적지를 좋아하고, B는 이곳저곳에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나는 시장과 거리를 좋아하니 낮에는 각자 가고 싶었던 장소에서 돌아다니다가 저녁엔 숙소에서 만나 맥주 한 병 짠 하며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놀자고 했다. 상상만으로도 재밌어서 한동안 얘기했지만 그즈음 생긴 몇몇 사정 때문에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 방식은 내 여행 버킷리스트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침 여행 메이트가 있는지라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언니에게 각자 가고 싶은 곳에 가봐도 좋겠다고 말했다. 언니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그러마 했다. 


나는 화산1914문화지구에 가겠다고 하고 지도 앱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중산부터 화산지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우산을 펴 들고 씩씩하게 걸었다. 가다가 물도 사 먹고, 작은 모퉁이 가게도 보면서. 거의 다 왔구나 하고 옆을 봤더니 도시재생사업 팸플릿에 나올 법한 재생+문화공간스러운 건물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도착! 

양조장을 개조한 화산문화지구1914.

양조장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화산지구는 낡은 건물에 드리운 담쟁이 덩쿨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고풍스러웠다. 여러 건물마다 갤러리, 카페, 편집숍들이 들어서 있고 전시와 영화제 등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티켓은 이미 매진이었고 사람들은 줄지어 섰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어느 도시나 영화제가 이렇게 사람들을 움직이는 즐거운 행사면 좋을 텐데. 

거리 예술가들의 마임 공연을 잠깐 구경했고, 2층에 작은 서점 겸 카페가 있어서 지친 참에 잠깐 쉬기로 했다. 아이스라떼를 시키고 대만판 <빅이슈>를 구경했다. 보이는 글자는 모두 한자라서 그림만 보았다. 


창 밖으로 화산지구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서울에선 노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젊은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이용해 문화 공간을 방문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애인의 이동권이 아주 열악하단 의미가 아닐까. 그에 반해 사람이 아주 많은 주말, 인기 있는 장소에도 장애인들이 거리낌 없이 나올 수 있는 타이베이는 상대적으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 도시라는 표식 아닐까. 

(좌) 마임 공연이 한창이었다. (우) 책 읽기 좋았던 화산지구의 조용한 카페 내부

대만에서 수준 높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느꼈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필름하우스의 화장실을 이용할 때, 화장실의 칸이 셋이었다. 여성 칸, 남성 칸, 그리고 성중립 칸이 있었다. 

성중립화장실은 남녀공용칸이 아니라, 머리가 짧은 여성이나 '여성적'이라 일컬어지는 스타일로 치장한 남성 등 겉모습과 성별이 사회적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탓에 화장실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화장실이다. 성 정체성, 성별, 신체 조건에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다. 


작년 지방선거 때 몇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세우며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나 역시 그때 처음 성중립화장실의 개념을 접하고 바로 대만에서 성중립화장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 


대만의 소수자 인식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필요한 인프라가 적지 않게 제공된다는 데에서 아주 좋은 사례였다. 지금 내가 어떤 사회에 발 붙이고 살고 있는지, 왜 자꾸 밖으로 나와서 내가 속한 사회보다 더 나아간 것들을 봐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용산사의 화려한 내부와 외부.

화산지구에서 문화생활을 만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곧 지하철을 타러 갔다. 언니와 만나기 전, 숙소 근처 용산사에 들를 계획이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진 용산사는 좀 특이하다. 사찰이라면 보통 불교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용산사는 불교와 도교, 유교의 중요한 신 여럿을 모시고 있는 종합 사찰이다. 대놓고 다신교를 인정하는 사찰이기 때문에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더라도 부담 없이 찾아가기 좋다. 


그래서인가 대만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사찰이라고 들었다. 현지인부터 단체 한국인 관광객들까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비는 사이에 나도 슬쩍 끼어들어 작고 큰 소원들을 빌었다. 향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돌아보고 용산사와 바로 한두 블록 떨어진 화시제야시장으로 걸어가며 언니에게 연락했다. 만나서 서로 다녀온 곳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니는 타이베이101에 다녀왔다. 타이베이101은 아랍 에미리트에서 부르즈 할리파를 짓기 전까지의 아시아 최고층 빌딩. 타이베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비가 쏟아져서 물에 빠진 생쥐꼴로 다니다가 돌아온 탓에 언닌 아주 피곤해 보였다. 


배가 고파 조금씩 조용해지던 우리는 야시장 좌판을 열심히 탐색하며 먹을 만한 음식을 고르다가 순대처럼 생긴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나서 기적적으로 화기애애해졌다. 풍선 다트게임도 하고(둘 다 실패했다) 닭꼬치도 사 먹고 칠렐레 팔렐레 신이 나서 걸었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는 언니와의 마지막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3 : 딤섬과 필름하우스 그리고 각자도생(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