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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Apr 23. 2020

살기 위해, 숨과 싸우는 여자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한강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었다. 강렬하고 차갑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이정희라는 여자가 친구 서인주가 미시령에서 자동차 사고로 자살한 후 강석원이라는 남자를 찾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미술평론가 강석원은 화가였던 인주의 작업실을 생전 상태 그대로 손에 넣었고 그녀를 신화화할 작업을 시작한 상태다. 강석원의 시나리오 안에서 인주는 아름답고 재능 있었으나 정신병이 있었고 젊은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죽고 나서 재발견이 이뤄지고 전설이 될 예정이다. 정희는 인주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삶에의 애정과 신념이 있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강석원을 저지하고자 한다. 인주의 행적을 더듬어 근거를 찾아간다.

정희와 인주는 생과 죽음에서 얽히고설켜 있다. 인주의 연락두절과 정희의 이혼, 자살 시도 등 인생의 사건들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지만 떨어져서도, 죽기 직전에도 두 사람은 너무나 진득하게 얽혀 있다. 이정희라는 사람, 서인주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는 서로의 존재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예정된 결말이 책 서두부터 드러나서 완독하는 데는 약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캄캄한 방에서 읽다 보면 금세 방에는 인주가 향했던 겨울의 미시령 같은 한기가 돌았다. 


이야기에는 계속해서 우주의 이미지가 차용된다. 고작 450킬로미터인 대기권 아래 지구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작가는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라고 말한다. 인생이 쓰고 비참할 때 저 멀리 우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문제가 참 단순해진다. 고작 지구 인간의 인생일 뿐. 그것은 우주적으로 티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저 먼 우주에서부터 망원경을 당기고 당기고 당겨서 들여다본 인간의 생은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제 스스로 먹고 입히고 일하고 사랑하고 고뇌하고 끝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들의 행위엔 어떤 미학이 존재한다.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 세상은… 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

한강은 ‘breath fighting’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바람이 분다, 가라>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breath fighting’이란 의식불명의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다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쉴 때, 호흡이 충돌하는 상황을 일컫는 단어다. 한강은 호흡기를 쓰고 숨과 싸우는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정희이고 서인주이다. 정희는 인주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그녀의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소한 사실관계가 아니었다. 강석원이라는 권위를 부정하면서,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며 지켜주려 했던 가장 중요한 존엄과 신념체계를 두 사람은 공유한다. 살고자 숨과 싸우는 숭고한 의식이 소설의 끝을 장식한다. 이로써 확신할 수 있다.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딱 10년 전 발간된 소설이다. 한강은 <채식주의자> 이후 <바람이 분다, 가라>를 집필하며 소설에 염증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작위'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염증을 느끼게 된 거예요. 작품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괴롭고 고통스러웠어요."(2010.03, 매일경제 인터뷰 중) 가끔 글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닿을 수 있을지 의문에 빠지는 나는 그녀의 고통이 참 반가웠다. 영화 <디 아워스>에 등장하는, 지금도 책상 앞 한켠에 붙어 있는 "삶과의 투쟁 없이는 희망도 없어요"라는 대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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