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카톡 하나를 받았다. 절친한 친구 A로부터 축사를 봐달라는 요청이었다. 축사라니!’ 축사는 결혼 당사자 부모님이 읽는 거 아니었나? 외국 영화에 나오는 피로연 파티 같은 데서 베스트맨이나 메이드 오브 아너(여성 들러리 반장을 지칭하는 표현이란다)들이 샴페인 잔 치켜들고 “우리 OO이는 이런 친구였죠~” 감동과 재미 범벅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그건가? 내 친구가 어른이 되었구나. 축사를 다 쓰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열어본 축사는 귀엽고 감동적이었다. 축사에는 친구와의 개인적인 인연과 친분을 소개하는 내용부터 두 사람의 연애를 지켜보며 품었던 생각, 마지막으로 앞날에 대한 기원까지 정성스레 꽉꽉 들어차 있었다. 축사를 읽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비혼주의자인 내가 이 생에서 축사를 받아볼 일은 없을 거고, 이렇게 진심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마음이 가득 담긴 축하사를 받지 못한다는 게 괜히 아쉬웠다.
와중에 친구의 한마디가 서운함을 일축해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누구에게 이런 수고스럽지만 귀한 일을 맡길까 생각했는데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났어. 그리고 생각했지. 아마 거절할 거라고. 하지만 난 기꺼이 쓰고 읽어줄게.
친구의 예상은 틀렸다. 내가 아끼는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데 아무리 비혼인 나라도, 황금 같은 주말에 결혼식에 가는 일이 종종 거부할 수 없는 짐처럼 느껴지는 나라도, 별 수 없이 축사를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짤 거다. 인생의 중대사를 위한 축하의 글인데 당연한 걸! 상상만 했는데도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여전히 축사는 내 화두였다. 내가 만약 축사를 맡긴다면 누구에게 부탁할까 고민했다. 결혼할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단번에 떠오르는 명문가들의 얼굴이 있었고, 동시에 글과 친하지 않음에도 꼭 이야기를 듣고 싶은 얼굴들도 있었다. 원체 글 (받고 싶은) 욕심이 큰 자의식 과잉형 인간이라 모두에게 나를 주제로 스윗한 편지를 받고 싶은 마음일 터다.
만약 내가 인생의 중대사를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면, 참석자에게 축사는 필수, 최소 분량은 A4 1장이라고 해야겠네 후후, 하는 공상에 잠겨 있었다. 때마침 친구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결혼을 안 하게 될 것도 같아서 결혼식 축사 말고 서로 서른을 축복하는 글을 한 편씩 써주자.”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고 일단 멋진 서른 살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꾸밈없이, 진정 멋진 사람으로서 축하하는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11년째 친구가 되어준 친구를 위해, 그리고 이 멋진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을 내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 살수록 비대해지는 자아와 반대로 쪼그라드는 자존의 위기를 타개할 좋은 목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