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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으로 지시하는 인공지능,
지혜로 지휘하는 인간지성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을 능가하지만 인간지성은 능가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을 능가하지만 인간지성은 능가할 수 없다:

지식으로 지시하는 인공지능지혜로 지휘하는 인간지성



인공지능 기술은 날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창의성에도 위협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다가 인간의 창의성을 능가하는 작품을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날이 올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도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인공지능의 창작능력은 이미 인간을 능가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할 가능성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지성을 능가하는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인공지능은 가능하지만 인공지성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능과 지성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능(intelligenz)은 ‘-사이에서 고르기(inter-legere)’를 의미한다. 지능은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사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없고, 다만 시스템이 제공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를 수 있을 따름이다. 지능은 시스템의 논리를 따른다. 지능은 시스템 내재적이다…지능은 수평적 차원에 거주한다. 이와는 달리 바보는 지배적인 시스템, 즉 지능과 결별하면서 수직적인 것을 건드린다”(116쪽). 한병철의 《심리정치》에 나오는 말이다. 인공지능에서 지능은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과 스킬을 습득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다. 지능에는 기존 데이터에 숨겨진 의미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거나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던져줄 수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능력이 담겨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의 지능은 타자의 아픔에 측은지심을 발휘하며 발 벗고 나서는 결단과 결연한 행동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으며 오로지 알고리즘의 논리에 따라 계산하며 주어진 문제에 대응하는 능력이다. 지능과 달리 지성은 감성과의 조화를 통해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실천에 필요한 비판적 사유를 통해 타자의 아픔을 헤아리는 인문학적 사유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기존 데이터 기반 논리적 추론과 합리적 사유를 추구하는 지능과 다르게 지성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를 심사숙고하고 딜레마 상황에서도 비판적 성찰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을 행동을 추구한다. 수학적 계산이나 과학적 논증만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서 주어진 문제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이해타산을 떠나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윤리적 판단과 실행능력은 지능에서 나올 수 없고 오로지 지성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누군가 원하는 단 하나의 정답을 빨리 찾아내는 지능과 다르게 지성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일리 있는 해답의 가능성을 자기만의 주관적 관점과 다양한 해석으로 드높여나가는 고도의 지적 안목과 식견이다. 지능은 지식을 창조할 수 있지만 지혜는 불가능하다. 지혜는 지능이 아니라 지성으로 창조되는 혜안이자 몸이 개입된 신체적 경험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산물이다. 지능은 논리적 이성의 기능이지만 지성은 논리적 이성을 포함하여 감수성은 물론 보이지 않는 이면의 원리나 구조를 꿰뚫어 통찰하는 심미안이나 영성이 합작하며 발휘하는 예술적 능력에 가깝다.



지능은 시스템 내에 산재하는 데이터를 수평적으로 검색해서 편집, 사람을 놀라게 창작하는 지식을 산출하지만, 지성은 몸을 던져 신체가 구체적인 맥락에서 경험하는 색다른 깨우침의 지혜를 낳는 원동력이다. 지식으로 지시해서 원하는 결과나 목표를 달성하는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반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능성의 세계에 뛰어들어 색다른 깨달음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서 지혜로 지휘해서 일생일대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을 마련하거나 이정표를 만들 수 있다. 지식으로 지시해서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인공지능과 지혜로 지휘해서 의미심장한 성취감을 맛보는 인간지성의 차이는 좁힐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 일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이고, 지금 하는 일을 통해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고, 축적된 지식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답습할 때, 나에게 다가오는 삶의 위험과 위협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한 번 축적한 지식으로 이전과 비슷한 방향과 방법으로 재단한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지금부터 살아가는 삶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자질과 능력 측면에서 바라볼 때 “무엇이 주연인지 조연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내 삶의 방향을 지휘하는 일을 어제와 다르게 반복하다 일정한 때가 되면 반전을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삶을 영위할 때 인간지성은 인공지능을 능가할 수 있다. 지식으로 지시하다 시시해지지 않고 지혜로 지휘하는 혜안과 식견을 가지려면 다음에서 언급되는 인공지능의 치명적인 한계와 태생적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첫째, 인공지능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몸을 움직여 도전해 보거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은 개인적인 경험적 교훈이 없다는 이야기다. 본인이 직접 겪어본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100% 남의 이야기를 편집해서 보여주는 인공지능의 편집된 이야기는 재미가 있기 어렵다. 똑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당사자가 직접 겪어본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적 교훈이나 깨달음에 비추어 스토리텔링을 할 때 상대는 감동받는다. 땀은 수고와 정성의 대가로 흐르는 노력의 증표다. 땀을 흘리지 않는 인공지능은 주로 머리를 써서 인간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던진 질문의 내용을 분석한 다음 해당 질문에 적합한 데이터를 수평적으로 탐문하고 조사하고 분석한 다음 적절한 답을 편집해서 보여준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답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지만 감동시키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놀라운 창작물을 인공지능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보여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공지능이 만든 경이로운 작품에 감탄사가 연발되지만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언어로 자신이 겪은 경험적 깨달음을 번역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래서 100% 관념적인 머리의 언어다.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언어는 몸을 던져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그 과정에서 신체성이 구체적인 상황적 맥락과 마주치며 사투를 벌인 경험을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탄생하는 몸의 언어가 아니다.



둘째, 인공지능은 맥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 중의 하나가 맥락적 사유다. 청중이나 상대방을 대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눈치를 보면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여기서 먹히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농담을 던졌을 때 농담으로 받아들이는지 진담으로 받아들이는지를 파악한 다음, 기대와는 반대로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바로 사태수습을 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맥락적 사유는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적인 능력이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은 전달자의 의도와 의미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파악하면서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의미나 유형을 바꾸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맥락적 사유는 한 마디로 종합적인 상황판단능력이다. 지금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청중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왜 의도와 다르게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한 다음 본래 의도와 다르게 의미를 바꾸거나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전략을 변화시키는 임기응변력이 바로 맥락적 사유다. 인공지능은 순간적으로 변하는 상황에 대응하면서 각본에 없는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대로 즉각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다. 즉 인공지능은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각본에 없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며 판단하고 대응하는 상담할 능력이 없다.



셋째, 인공지능은 기대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사과 10개 중에 3개 먹으면 몇 개 남느냐고 물어보면 7개 남는다고 대답한다. 10-3=7이라는 수학적 논리에 따른 정확한 답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아주 쉬운 산수 문제를 냈다. 사과 10개 중에 3개를 먹으면 남은 사과는 몇 개일까? 어느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한다. 정답은 3개라고. 왜 3개냐고 선생님이 물어보았다. “엄마가 그러는 데 먹는 게 남는 거라고.” 순간 교실은 웃음바다로 바뀌었다. 기대했던 답은 7이지만 기대를 저버리고 세 개라는 뜻밖의 답을 내놓은 덕분에 학생들의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머는 기대를 망가뜨리고 생각지도 못한 틀 밖의 사유를 이끌어낼 때 터진다. 여기서 핵심은 기대했던 대로 반응하면 기대에 부응할 뿐 색다른 반전이나 역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주어진 시스템이 내장한 알고리즘의 논리를 따르며 계산한다. 인공지능도 수학적 논리를 따라 정답을 찾아내는 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정답이 아닌 엉뚱한 답을 기대를 망가뜨리며 내놓는 바보짓을 할 수 없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는 답이지만 해답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비록 정답은 아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는 한 가지 해답은 될 수 있다. 10개 중에 3개 먹으면 3개 남는다는 대답은 논리적 정합성에 맞지 않는 오답이지만 뜻밖에 웃음코드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재미있는 대안은 될 수 있다.



넷째, 인공지능은 익숙한 것의 엉뚱한 조합이 갖는 의미를 모른다. 챗 GPT에게 독서와 피클은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답을 내놓는다. 결혼과 양파는 무슨 관계냐고 물어봐도 상상을 초월하거나 무릎을 칠 정도로 뜻밖의 통찰력 있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인공지능은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수평적으로 검색한 다음 그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데이터를 편집해서 보여준다. 당연히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추능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어 보이는 답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은유 능력에 결정적으로 약하다. 젼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연결시켜 닮은 점을 찾아내는 사유가 은유다. 독서와 피클, 결혼과 양파는 겉으로 보기에 닮은 점이 없는 이질적인 성질로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 가지는 닮았다. 책을 읽기 전에 오이였다가 책을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피클로 바뀐다. 결혼은 양파처럼 까도 까도 새로운 성질이 나타날 수도 있고, 눈물이 날 수도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이제껏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이질성의 정도가 큰 두 가지를 연결시켜 관계를 물어보면 답을 찾지 못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면 뱃살과 비무장지대는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김영민의 교수가 한 칼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뱃살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있는 무책임한 비무장지대”라는 사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최초의 연결로 일어나는 새로운 사유다.



다섯 번째, 인공지능은 모른 척 하지 못 한다. 인공지능은 뭔가를 보고도 지금 당장 모르는 걸 붙잡고 그것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숙고하며 성찰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정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붙잡고 그것이 함의하는 다양한 가능성이나 대안을 탐색하는 능력은 인간의 지성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책을 읽는 와중에 난해한 문장이나 개념을 만나면 그것에 담긴 저자의 의도나 의미를 모두 확인하며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 당장 모르더라도 일단 넘어가서 나중에 생각해 보려는 미뤄놓기 능력은 인공지능에게 없다. 《상황인지》를 쓴 박동섭에 따르면 이런 능력을 ‘건너뛰기 능력’ 혹은 ‘무시’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의미 있는 정보와 의미 없는 정보를 순간적으로 판단한 다음, 그것의 의미를 나중에 연상해서 따져보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의미로 뻗어나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생각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는 가운데 의미가 생각지도 못한 연결과 난반사로 연상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어서 묵혀두면서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복잡한 문제나 다양한 화두에 빠져 지내던 인간지성이 알 수 없다고 미루 두었던 정보나 의미를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새로운 의미의 변주로 폭발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성뿐이다. 알 수 없는 정보를 ‘알 수 없는 정보’로 로 둔 채 시간을 들여 묵히는 미뤄 놓기 능력은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다”(36쪽).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에 나오는 말이다. 뭔가를 봤지만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의도를 뒤로 미룬 채 모호한 의미의 바다를 항해하다 나중에 불현듯 그것의 의미를 다른 것과 연상시켜 새로운 의미의 파도로 창조하는 능력은 오로지 인간 지성만이 갖고 있는 고난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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