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교리로 삶을 ‘증명’하기보다 삶으로 교리를 ‘증거’하다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를 읽고

교리로 삶을 증명하기보다 삶으로 교리를 증거하다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를 읽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마음부터 불편한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기독교라는 종교적 교리에 비추어 해석을 하고 평가하며 판단당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해본 당사자로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리관이 시공을 초월해서 올바른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지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현듯 느껴질 때마다 불편한 감정은 숨기기 어렵다. 진리에 이르는 단 한 가지 길만 존재하지 않듯이 저마다 믿고 따르는 신에게 이르는 길도 사람마다 다른 방법과 노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획일화시켜 구원받기 어려운 존재로 해석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시선이 이미 평범한 사람들의 사선을 넘은 지 오래다. 사람은 뭔가 자신도 모르게 끌림이 생길 때 이성적 판단 이전에 끌림이 이끄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강남순 교수님의 이번 책, 《철학자 예수》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끌림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쉬지 않고 단숨에 빠져 읽어버렸다. 종교적 구원자나 메시아로서의 예수라고 했으면 끌리지 않았을 텐데, 예수가 철학자로 변신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성서는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을 촉발하는 초대장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읽어버렸다”거나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아타루는 자신의 책에서 책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은 이상 읽은 대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삶을 변혁하는 수단과 촉발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은 이처럼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서 삶의 혁명을 이끄는 실천으로 이끄는 혁명의 촉발점으로 다가온다. Deleuze & Guattari(1980)가 《천 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는 책의 의미가 이 시점에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책은 일정한 의미를 품고 역사적으로 정체된 상태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외부의 누구와 만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배치다. 책과 배치가 바뀌면서 텍스트는 콘텍스트에 따라 부단히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의미의 생성체다. 책은 과거를 품고 있는 역사적 교과서가 아니라 미래의 누구와 어떤 배치를 만드느냐에 따라 가변적으로 의미가 바뀌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책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이 고스란히 내부적으로 간직된 폐쇄적 의미의 결정체가 아니라 저자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썼더라고 하더라도 그걸 해석하는 사람의 문제의식에 따라 부단히 재탄생하는 생성적 의미의 잉태실이다. 책은 저자의 의미와 의도가 수많은 곁가지로 뻗어가면서 수직적 위계를 띄는 수직적 계통구조로 짜인 통일된 집합체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언제나 중간지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다른 사상적 뿌리와 우발적으로 만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리좀형 의미의 발산체다. 따라서 책은 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역사적 문맥에서 파고들어 따져보는 해석이 중요하기보다 언제 누가 어디서 그 책과 만나는지에 따라 배치가 바뀜으로써 의미대로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매개체다. 책은 누군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배치를 달리 함으로써 색다른 의미를 현실에 구현하는 실천의 촉발물이다. 마찬가지로 성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 진리로 간직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달라지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앎의 경로를 의심할 때 앎의 결과에도 의문이 든다


《철학자 예수》도 오랜 역사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되어 온 성서와 만나는 배치를 바꿔서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 위해 한글 성서보다 영어 성서를 참고했고, 성서에 사용되는 언어적이고 성적인 편견과 종교적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평등언어와 포괄적 언어를 사용하고 나아가 일상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동안의 성서와 만났던 사람들과 배치를 바꿔서 전혀 다른 방식의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의 선물을 선사해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성서와 기존 종교나 교회가 만나서 이룩한 기존의 배치 구도가 낳은 타성과 통념에 젖은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중심부에 동조(同朝)하거나 동화(同化)시키는 주류담론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예수의 ‘뿌리 뽑힌 삶(uprooted life)’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류 담론의 의사결정 근거는 언제나 중심부에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변화는 엄격한 의미로 변화라기보다 ‘동화’다. 동화는 중심부에 얼마나 가깝게 따라가느냐가 변화의 판단 척도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중심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주변부나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동안 주류 담론으로 해석되어 이해되었던 기독교와 교회 중심의 예수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두도 교회와 기독교 밖에서 예수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중심부 시선이 얼마나 예수의 본질적 가르침이라는 사선을 넘나들며 왜곡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이중보기 방식이나 시선(double mode of seeing)이 지금 필요한 까닭이다.


《철학자 예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기독교적 예수나 교회의 교리로 포장 또는 위장된 예수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앎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서 생기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버리는 가운데 시작된다는 게 바로 비학습 또는 창조적 파괴를 통한 버림 학습(unlearning)이나 탈학습(delearning) 아니던가. 배움이라는 탐구 여정을 떠나 기전에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을 버리고 나는 모른다고 시작해야 새로운 앎이 삶을 통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36쪽).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물어보지 않는다. 앎의 경로에서 심각한 오염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갖고 이전과 다른 앎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때 전혀 다른 낯선 가능성 앞에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여정’이란 출발점은 있지만, 최종적인 ‘도착점’은 없다”(35쪽). 그 여정에는 기존 가정을 의문에 붙여 놓고 부단히 탐구하는 열정만 있을 뿐이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품은 의문의 화살은 끝도 없이 앎으로 밝혀보고 싶은 과녁을 향해 쉼 없이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예수에 대한 단편적인 앎은 전부 교회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을 통해 듣고 보고 느낀 지극히 편향적인 의견(疑見)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저자도 교회와 교리 안에 갇힌 예수를 탈절대화-탈교리화-탈종교화시켜 길들여진 예수의 장막을 걷어내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몸으로 만나 건져 올린 신체성의 가르침으로 정체성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본 축적으로 건축하거나 증축한 화려한 교회나 성당의 높은 제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설법을 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낮은 곳, 헐벗고 힘든 사람들이 매일매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가르침을 대신했다. 예수는 철학을 관념의 파편과 공허한 논리로 설파하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아픈 현실을 만나며 진실을 캐내고 그 속에서 진리를 꽃피우려고 몸을 던졌던 거리의 철학자이자 삶의 스승이다.



예수는 저 세상을 꿈꾸지 않고 이 세상 한가운데 함께--살아감을 실천했다


철학자 “예수는 인간의 육체성-너머의 세계에 대한 영성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50쪽). 충격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기도만 열심히 해도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는 기독교적 주장에 늘 의문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가 타인의 시선을 넘어섰다. “예수의 가르침 핵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현실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다”(53쪽). 예수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는 도래할 미래가 아니다. 지금 하기 싫어도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을 살다가 오히려 통증만 생기는 고진통래(苦盡痛來)만 올뿐이다. 우리는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가 온몬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친 사랑,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실천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의 시제는 지금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게 배우는 사랑과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는 모두 추상명사가 아니라 매일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구현하는 동사다. 추상명사의 동사화가 바로 예수가 꿈꾸는 거리의 철학자로서의 삶이 아닐까. 한 마디로 예수는 “‘저 세상(other world)’이 아니라 ‘이 세상(this world)’ 한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58-59쪽)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화된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238). 저자의 주장은 한곁같다. 예수와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동일하지 않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밝히며 세상 사람들을 가르쳤던 예수의 가르침은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고,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 신자에게만 미래로 향하는 빛을 밝혀 마침내 천당에 간다는 주장으로 왜곡되고 곡해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비방하는 수준까지 치닫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 교리의 토대를 구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100쪽).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회나 성당에 모여 교리화된 믿음의 문장을 낭송하고 기억에 각인시키기보다 삶의 현장으로 몸을 던져 몸으로 앎을 증명해 보였다. “반면 기독교는 ‘무엇’이라는 교리적 전통을 구축하면서 그 존재의미를 이어왔다”(100쪽). 우리는 그동안 기독교 교리 속에 화석화된 상태로 고정된 절대적 신이라는 존재로 예수를 신성시해 왔다. 실제로 예수는 꿈도 꾸지 않았던 영적 세계, 신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저세상으로 향하는 비현실적 꿈을 꾸기 위해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마땅히 참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억지논리도 위장된 교리다.



기독교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걸 배우는 장소가 교회라고 알고 있었다. 철학자 예수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기독교로 성문화된 교리에는 무리한 예수의 가르침이 잘 못 해석되어 있고, 교회는 박제화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치는 자본주의적 학교였다. 한 마디로 기독교와 교회는 예수를 절대적 진리의 성전으로 믿고 가르치지만 믿고 가르칠수록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292쪽)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제도화된 종교가 있지 않다”(292쪽). 예수는 호화 건축물 속의 화려한 교단에서 설교하지 않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지 않았다. 예수는 헌금을 모아 현금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새벽에 모여 통성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르침을 종교적 교리로 정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시간을 갖는 대신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오로지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르침을 대신하였다. 입이 아니라 몸으로 증거 하는 삶을 통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계”(아모스 5:24)에서 다양한 생명이 “함께-잘-살아감”(294쪽)의 길을 온몸으로 모색한 산증인이다. 예수는 중심부를 기웃거리며 동화되는 삶보다 변방의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한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의 전형이다.


삶의 철학자 예수가 실천한 사랑도 한 마디로 확정해서 정의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데리다의 철학에 비추어 예수의 사랑을 해석하면 ‘무엇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누구를’ 조건 없이 사랑하기보다 ‘무엇을’ 어떤 조건에 비추어 사랑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표적으로 결혼정보회사가 제공하는 사랑의 등급은 숭고한 사랑을 주고받는 누구를 무엇으로 대체해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사랑을 전락시켰다. 사랑에서 ‘누구를’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단독적인 고유함을 지닌 작품이다. 반면에 사랑에서 ‘무엇을’이 차지하는 의미는 금전적 가치로 대체가 가능한 자본증식용 상품이다.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작품으로 다가가는 사랑과 돈만 있으면 어떤 상품으로도 대체가 가능한 상품에 접근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게 하는 언제나 새로운 원리”(124쪽) 라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는 결국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강도와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대부분의 삶의 철학을 보면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 믿음과 사랑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로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환대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


사랑은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탄생성(natality)’과 예수가 실천적 덕목으로 강조하는 용서라는 미덕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로운 탄생 가능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새롭게 태어남의 가능성은 언제나 과거에 범했던 실수나 죄과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줄 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관문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용서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전제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용서이자 불가능성도 뛰어넘은 용서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말하는 용서는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의미와 깊이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면서 어제와 다른 자세와 태도로 용서하는 ‘도래할 용서(forgiveness to-com)’다. 도래할 용서 속에서 “당신의 죄들이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로 표현하면서 주어와 목적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능동태형 용서에 잠재된 용서하는 주체와 받는 객체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종속관계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은 ‘어느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따져 물은 다음 해당 종파가 어떤 교리를 추종하는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려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랑과 용서로 새로운 탄생가능성을 높여나가는 구체적인 노력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환대로 예수가 실천하는 또 다른 삶의 미덕과 맞닿는다.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는 나와 인식과 관심이 다른 전문분야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경계성의 환대이자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건 없이 초대하는 무조건적 다름의 환대다. 아무리 많은 환대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해도 여전히 환대는 인간적 노력으로 완결할 수 없는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다가오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다. 지금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환대를 열어놓고 지금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불가능성의 환대로 한 걸음 내딛을 때 오늘보다 나은 환대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인간적 연민과 공감의 연대가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건축될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종교적 교리로 만들어 교회에서 그걸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언제나 ‘함께-잘-살아감’에 있어서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도래할 환대’의 연대망을 구축하는 데 있다.



예수는 지행일치보다 지행합일을 추구한 삶의 철학자다


종교적 교리로 박제된 예수의 가르침은 푸코가 말하는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논리로 해체되어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이 권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권력이 지식의 여부를 결정한다. 오늘날의 종교와 교회는 교리로 통용될 예수의 가르침을 선별해서 결정할 권력을 갖고 있다. 교리에 포함되는 진리는 종파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방식은 물론 그걸로 인해 얻는 해답도 다르다. 종파가 다르면 예수의 가르침도 전혀 다른 논리로 포장되면서 권력을 갖게 되고 강제적 구속력을 띤다. 문제는 교리가 맥락성을 띤 상태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탈맥락적인 경우가 많다. 네 이웃을 사랑하하고 하지만 이웃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여기서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구체적인 동사로 실천하는 신체성도 다르다. 똑같은 교리도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일리 있는 교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무리가 따르는 교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했듯이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을 넘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했다. 예술작품을 창작의도와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작품성을 자의적으로 해독하는 행위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예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가르친 사랑과 용서, 환대와 용서, 정의와 평등을 예수의 본래 의도나 의지와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원래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몸으로 가르친 덕목을 삶의 실천 철학을 구현함으로써 함께 살아감을 일상적 삶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곧 교회를 다니는 것이고, 교회를 다니는 길만이 예수가 말한 예수가 말한 “나는 길입니다. 나는 진리입니다”의 길이자 진리가 아니다.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로 향하는 한 가지 일리는 될 수 있지만 그 길만이 예수의 가르친 삶을 실천하는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는 아니지 않은가.



예수는 이런 정황이 비추어 볼 때 추상화된 교리를 관념적 철학으로 정립해서 전파하며 일상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리와 괴리된 진리를 옹호하는 강단 설교자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입장을 따로 정립, 무지몽매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권하는 강단철학자는 더욱더 아니다. “예수의 철학에서 앎(knowing)과 실천(doing)은 분리되지 않는다”(47쪽). 이런 점에서 예수는 알고 난 다음 행동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적 철학자가 아니라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적 철학자였다. 예수는 오로지 “어떻게 의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46쪽)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삶의 현장에서 직접 몸을 던져 실천해보지 않으면 구체적인 방법을 알 수 없다. 방법은 언제나 책상머리에서 요리조리 잔머리 굴린 관념적 파편의 조합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던져 겪어보는 시행착오가 낳은 판단착오의 산물이다.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만이 어제와 질적으로 다른 판단착오를 줄이는 삶의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를 사랑했던 예수는 누군가 개발한 지혜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격전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다.



예수는 질환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돌봄의 전형이다

     

예수는 앎으로 삶을 증명하지 않고 삶으로 앎을 증거 했다. 예수는 입을 통해 가르치는 설교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사랑과 용서, 연민과 환대를 실천함으로써 가르쳤다. 무엇이 인간을 넘어 인류를 사랑하는 삶인지, 관념적 주장을 설교로만 전하지 않고 온갖 문제가 펼쳐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을 던져 실천하면서 가르친 산 증인이다. 사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기보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정문일침(頂門一針)에 가깝다. 당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스스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으며, 헐벗고 가난한 사람, 힘들과 고달픈 사람들에게 발 벗고 나서서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일상의 수호신이었다. 예수는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 그들이 힘든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살피고 보살피는 돌봄의 전형이다.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예수가 교회나 성당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하는 의사였다면 각각의 구성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일반화시켜 하나의 질환으로 규정한 다음 그걸 치료하는 일반적인 약을 처방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저마다 사람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의 감각적 차이는 그 사람이 지금 놓여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보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을 몸으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무대는 언제나 교회나 성당과 같은 화려한 건물의 제단이나 성전이 아니라 매일매일 사람들이 살아내는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기도(祈禱)만 하면 기도(氣道)가 막힌다


기독교를 비롯 대부분의 종교는 기도를 통해 갈구하는 신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도가 자신의 안위와 행복, 성공과 성취를 위한 조건적 기도에 있다. 수험생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 투자한 건물이나 대상이 망하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비는 기도, 사업적 성공을 기원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올리는 각종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수록 기도만 막힐 뿐이다. 내가 목격한 가장 믿을 수 없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말은 기도가 부족해서 꿈꾸던 목적이나 기대했던 성공이 물 건너갔다는 말이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도 하느님께서 다 들어준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갖는 기도의 의미는 실천 없이 기도만 열심히 해서 정말 기도가 막힐 수 있는 기도다. 기도는 나만 잘 되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간절한 기원이 아니라 ‘함께-잘-살아감’의 연대에서 벗어나 힘든 삶을 매일 겪어내는 사람들과 연민과 그들을 향한 책임성으로서의 기도가 함께 이루어질 때, 기도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나 자신으로부터 물러나서, ‘나-너머의 존재’와 대화하는 의도적 고독의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323쪽)이다. 들뢰즈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은 대체 불가능하고 반복 불가능한 비가역적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에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이 다양한 기호로 해석될 때, 현재 몸담고 살아가는 ‘지금의 세계(the world of already)’와 내가 갈망하는 ‘도래할 세계(the world-to-come, the world of not yet)’의 간극을 성찰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해 보는 용기와 결단이 생긴다. 기도는 나 자신을 깊이 사유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를 놓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꼭 기독교 신자가 교회에서만 하는 성스러운 독백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도래할 세계를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불가능성 속에서도 가능성의 관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시행착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담대하게 몸을 던질 때, 기도는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는 기원이 아니라 함께-잘-살아감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찰적 자기반성이다.


예수는 현장에서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고수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미덕, 사랑, 용서, 환대, 평등과 정의를 화력하고 웅장한 교회당이나 성전, 대학원과 같은 현실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에서 삶과 격리된 상태로 말과 글로 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가르쳤다”(239쪽). 예를 들면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십시오”라고 성경에 나오지만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사랑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나와 인식과 관심이 동질적인 이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상세계의 모든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다니지 못하는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을 사랑할 때 교회는 기독교인만이 머무는 특권적 장소가 아니라 예수가 평생을 통해 강조한 이웃사랑을 전파하는 만인의 학교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속 깊은 마음은 과학기술로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오늘도 내일도 뒹굴며 살아가는 격전의 현장으로 내려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철학”(145쪽)을 구현해야 한다. 속세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잘-살아봄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아랫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철학을 예수는 몸소 구현하면서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마주침의 깨우침을 건져 올렸다.


예수는 철저하게 머리의 언어,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평등의 철학을 보여준 산 증인이다. 고립된 삶을 죄인으로 살아가는 삭개오에게도 고귀한 한 인간으로 지극한 사랑으로 그를 환대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초대하였다. 당시에 예수가 사용하는 언어는 지식인이 사용하는 관념과 권위적 책상 언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타자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스며들어가는 체중이 실린 진심의 언어를 사용했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즉흥적으로 ‘반응’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말을 쏟아내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감각적으로 조응하고 상호작용하고 협력하면서 말을 만들어 낸다. 머리의 언어는 나오자마자 상대를 무시하거나 탈맥락적이라서 맴돌면서 문맥이 막히고 주변을 배회하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의 의중에 꽂히면서 맥락적 감수성에 조응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파고들어 꽂힌다. 예수는 이런 점에서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고수’다. 고수가 살아가는 터전은 강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예수는 밑으로부터 철학을 구현한 역경 극복의 명수다


《철학자 예수》는 저자도 말한 바와 같이 “펜으로 저항하기(Fighting with a pen)” 또는 “펜으로 변혁하기(Transforming with a pen)”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오용되어 심각한 폐해와 역기능을 양산하는 시대에 책임감으로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닫으면서 “도래할 또 다른 철학자 예수”를 기다린다. 해석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나의 맥락적 의미로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황(situation)이 바뀌면 맥락적(contextual) 의미도 더불어 변화되고 진화된다고 생각하면 《철학자 예수》는 무한 도래하는 영원한 미완성 철학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신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예수야 말로 불가능성을 좌절과 절망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가능성의 텃밭을 일궈낸 역경극복의 명수다. 쉽게 달성 가능하다면 우리는 굳이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한계가 경계를 가리고 장벽으로 앞을 가로막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려는 열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고 해석한 의미이자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환대로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책임성이기도 하다.


시공을 초월해서 종교적 독단의 논리로 포장된 교리에 함몰되어 구체적인 실천현장과 괴리된 상태에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충격적으로 울려 퍼지는 ‘경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한 예수의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칠수록 예수가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는 이상적 현실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대 교회는 과연,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 낯선 사람들, 헐벗고 아픈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처럼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힘을 주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데리다 말한 “종교란 책임성”의 철학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봐야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책임지지 않는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타자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환대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한 탄생이 거듭나는 세계에 예수가 몸을 던져 가르친 것처럼 기독교와 교회 속에 박제된 예수를 구해서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현장’에 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 우리가 찾는 ‘진실’이 숨어 있다. 이 책은 나처럼 왜곡된 정보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의 앞날을 밝혀줄 진정한 삶의 철학자는 바로 《철학자 예수》임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진리의 등불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름켜 경영으로 생태경영의 촛불을 밝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