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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켜 경영으로
생태경영의 촛불을 밝히다

고두현 시인의 《나무 심는 CEO》를 읽고

부름켜 경영으로 생태경영의 촛불을 밝히다

고두현 시인의 나무 심는 CEO를 읽고


CEO는 시이오(詩理悟)라고 작명한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듯이 기업경영의 최고 자리에서 촌음을 다투는 의사결정과 과감한 행동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최고경영자(CEO)에게는 늘 남다른 영감이 필요하다. 영감의 원천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가 역발상이나 창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중한 원천이 되는 이유는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묘사하고 기술하는 언어가 색다르다. 매번 반복되는 삶의 관성의 늪에 빠져 고정관념과 통념에 갇힌 언어적 사용 방식에 막혀 있다. 경험이 다르지만 그 경험을 어제와 다르게 표현할 언어 사용 방식이 틀에 박히면 사고방식도 틀에 박힌다. 기존 언어 사용 방식을 파기하지 않고 습관적인 언어를 사용할수록 끈적끈적한 언어적 점성(粘性)에 붙잡혀 습관과 관습의 덫에 걸려 세상은 늘 뻔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인은 뻔해 보이는 반복되는 삶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관찰하면서 발상을 깨는 언어를 사용하여 색다른 깨우침을 선물로 준다. 경영자일수록 시인의 눈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익숙한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사업가적 안목과 통찰력이 누구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업의 본질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생각으로 사물이나 도구, 사람이나 생명체가 지닌 아픔을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파악, 어제와 다르게 자아를 끊임없이 재 서술하는 사람이다.



부름켜 경영에서 생태경영의 지혜를 배우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는 것과 같다. 그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5쪽). 미국의 신학자, 존 파이퍼의 명언으로 시작하는 《나무 심는 CEO》는 시인이 쓴 인문학적 생태 경영서다. 책 첫 페이지부터 인두 같은 한 문장이 책을 넘기지 못하도록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더불어 나무를 비롯해 생태계를 파고드는 깊은 사색의 향연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스치면 인연이지만 스미면 연인이 된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스쳐 지나가지 않고 스며들게 만드는 시인의 문장이 부드럽게 애무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생태학자나 산림전공 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근간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나무 관련 전공서적과는 다르게 시인은 나무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익숙한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날아오르게 만든다. 나무를 비롯해 자연의 생명체를 묘사하는 언어 자체가 시적이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6쪽). 나뭇가지는 안테나 성능을 받아들이고 안테나는 잠시 나뭇가지로 변신하여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을 비트는 사이 새롭게 태어나는 사유, 우리가 특히 시인의 언어에 주목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나뭇가지를 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예를 들면 지식생태학자인 유영만은 “여러 가지지만 마찬가지”라는 언어유희를 동원해 나뭇가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뻗어나가는 생태학적 지혜를 강조한다. 꼴불견으로 보이는 행동을 여러 가지 하는 사람에게 비아냥 조로 하는 말이 바로 “가지가지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나뭇가지를 고성능 안테나에 비유하는 사유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아무 생각 없이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존재 이유를 시심으로 포착해서 맛깔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인은 세계 최초 ‘부름켜 경영’을 창안, 나무에서 배우는 인문경영의 진수를 전수해준다. 부름켜는 “새로운 세포로 줄기나 뿌리를 굵게 만드는 식물의 부위”(7쪽)다. 부름켜(cambium, 形成層)는 ‘불어나다’의 어간인 ‘붇’과 명사형 ‘음’, 층을 뜻하는 ‘켜’가 합쳐진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부름켜는 한 마디로 봄과 여름에는 식물 호르몬을 왕성하게 분비해서 안으로는 목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 밖으로는 뜻하지 않은 위협에 대비하는 껍질을 만드는 성장기 제다. 부름켜는 날씨가 온후하고 따뜻한 봄부터 여름까지 세포분열을 활발하게 전개해서 많은 부피 생장을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부피 생장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면서 세포도 작고 단단하게 형성된다. 우리가 말하는 나이테는 부름켜가 일 년 동안 부피 성장을 거듭하면서 줄기 안에 남긴 흔적이 바로 나이테다.



‘부름켜’가 성장전략을 상징하는 나무의 속성이라면 ‘떨켜’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에너지를 차단하고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며 만드는 생존전략이다. 나무는 성장하기 위해 서 있는 자리에서 치열하게 광합성을 하고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양분을 만든다. 나무는 겨울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그동안 축적한 최소한의 에너지로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성했던 나뭇잎을 떨켜를 만들어 떨궈낸 다음 나목으로 새봄의 희망을 싹 틔울 준비를 한다. 나무의 성장과 생존 여정은 고스란히 나이테로 나타난다. “나이테가 몸 안이 주름이라면 주름살은 몸 밖의 나이테다”(112-123쪽). 사람의 이름은 주름이 만든 사회 역사적 산물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주름’이 되는 이유다. 



주름이 많은 구겨진 비행기가 멀리 날아간다


주름은 마치 구겨진 종이와 같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정석대로 접은 비행기보다 멀리 날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의 주체적 의지대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력(耐力)이 생긴다.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몸에 생긴 주름이 안으로 굽어지면서 그 안에 내가 겪은 숱한 삶의 애환이 사연으로 쌓인다. 주름이 안으로 생겨서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함축된다. 그게 바로 시사점(implication)이나 암시(暗示)다. 주름(pli)이 안(im)으로 생겨서 내포되거나 함축된 의미, 즉 함의(含意)다. 반대로 그 주름의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의미를 따져보는 게 설명(explication)이다. 주름이 안으로 접히면서 의미를 품고 있는 시사점이나 그 주름을 펼쳐보면서 주름에 내포된 의미를 따져보는 설명은 모두 한 사람이 이름값을 하면서 만들어온 주름의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행위다. 안으로 품고 있는 주름의 시사점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 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내가 겪은 모든 주름의 흔적은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용오름처럼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기류를 타며 자기 존재를 ‘아름’ 답게 드러냄으로써 한 편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필름’으로 남기기도 한다. 나무는 살아가면서 나무가 겪은 모든 주름을 나무테로 만든다. 나무테의 무늬 속에서는 나무가 살아오면서 겪은 얼룩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나무는 나무테로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과 사연이 생태학적 사유를 낳는다


《나무 심는 CEO》에는 과학자의 객관적 사실과 시인의 인문학적 감수성이 절묘하게 뒤섞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적 영감을 가져다준다. “심마니에게도 등급이 있다. 초보자는 마구 돌아다니는 ‘천둥마니’, 다음은 ‘둘째마니’ 혹은 ‘소장(젊은) 마니’, 그다음은 경험 많고 노련한 ‘어인마니’다.” 심마니들에게 얼치는 오래 묵어도 약이 되지 않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치를 말한다. ‘천둥마니’나 ‘둘째 마니’에게는 최상품 ‘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인마니’에게는 어림도 없다. 산삼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은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생기는 통찰력의 산물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어제와 미묘하게 다르게 변화되는 디테일의 차이를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뭔가를 보살필 수 없다. 그래서 어인마니에게 “산삼을 채취할 때에는 ‘캔다’는 말 대신 ‘돋운다’는 표현을 쓴다”(54쪽). ‘캔다’는 말은 캐는 사람의 기술적 전문성을 중심으로 개발되는 능수능란한 전문가의 작업 행위를 지칭하지만 ‘돋운다’는 말은 자연이 선물해준 경이로운 산삼을 대하는 심마니의 지극 정성과 경건한 자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캐내면 물질적 상품이 되지만 돋우면 존재 자체가 풍기는 신비로운 자태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자연의 작품이 된다. 



시인의 관찰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따는 녹차 잎을 우전차라고 하는데, “맨 먼저 딴 찻잎이라 해서 첫물차라고도 하는데, 맛이 좋고 향이 은은하며 생산량은 적어 값이 비싸다. 곡우가 지나면 순이 잎으로 변해 맛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220쪽). 우전차 맛이 특별히 녹차향을 내는 이유는 순이 잎으로 변하기 전에 땄기 때문이라는 관찰, 연한 새순이 진한 잎으로 바뀌는 순간, 그 미묘한 순간의 차이가 자연이 전해준 놀라운 맛의 차이로 드러난다. 곡우를 앞두고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단비다. 그 단비가 내려준 수분 덕분에 온 세상은 각양각색의 꽃들이 때를 두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꽃잎 뒤태를 슬며시 들추며 딴청 피우는 빗소리 때문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는 것도 모를 뻔했다”(220쪽). 시인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시심으로 물든 ‘앓음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두 같은 문장 덕분에 오늘도 활자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문장보다 자연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느낌을 감지한 시인이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걸 받아 적는 시인의 문장에서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의미심장함을 발견한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는 것과 같다. 그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라고 했던 존 파이퍼의 명언이 실감 나는 이유다.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구분하는 시인의 안목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면 산수유 꽃은 길이 1센티미터쯤의 가는 꽃가루 끝에 달려 있고, 생강나무 꽃은 그냥 가지에 붙어 있다. 꽃을 피운 줄기 끝도 산수유는 색깔이 갈색이고 생강나무는 녹색이다”(226쪽). 주변에 널려 있는 삼라만상이 모습이 누군가에는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는 어제와 다른 상상력의 텃밭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눈은 육안(肉眼)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뇌안(腦眼)을 넘어 측은지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심안(心眼)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꿰뚫어 통찰하는 영안(靈眼)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육안과 뇌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아무나 갖고 있지 않는 심안과 영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CEO가 배워야 할 사업하는 안목은 육안과 뇌안보다 심안과 영안에서 비롯됨을 이 책은 침묵의 목소리로 우렁차게 주장한다. “산수유는 재배하지만 생강나무는 자생한다”(227쪽). 산에는 생강나무가 많고 도시나 마을 근처에는 산수유가 많은 이유다. 야생성의 핵심은 자생성이다. 스스로 자라려는 안간힘과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려는 애쓰기는 누군가의 돌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야생에서 비바람과 천둥번개도 맞고 자라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는 야생성이 자생성을 낳고, 그 자생성이 한 생명체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선수유와 생강나무의 다른 정체성도 삶의 무대가 다른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기는 자기 존재 증명이다.



물아일체의 자세가 역지사지의 지혜를 가져온다


비슷한 맥락에서 억새와 갈대도 혼동하는 풀이다. 첫째, 억새가 주로 산간지방에서 자라고 갈대가 주로 물가에서 자란다. 갈대는 갈 데가 없어서 물가에서 주로 자라고 억새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억세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일까. 순천만 습지와 같은 곳에 자라는 것은 갈대이고, 제주도 오름 언덕에서 장관을 이루는 것은 억새다. 산에 가서 갈대를 만날 수 없고, 물가에서는 억새를 만날 수 없는 이유다. 둘째 갈대와 억새는 색깔이 다르다. 갈대는 갈색이고, 억새는 은색이나 흰색깔을 띤다. 셋째 갈대와 억새는 상징적인 의미도 다르다. 억새는 이름처럼 억센 줄기를 갖고 바람에 흔들리지만 굽히지 않는다. 갈대는 흔들리며 자라는 가을 들판의 대명사처럼 여리고 연약하지만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넷째, 갈대와 억새는 이삭의 모습이 다르다. 갈대의 이삭은 사방으로 흩어져 풍성한 모습을 보이지만, 억새의 이삭은 한쪽 방향을 향하는 모습을 띤다. 갈대의 이삭이 사방으로 퍼져 있는 까닭은 바람에 흔들리며 자신의 종족을 사방에 퍼뜨리기 위한 생존 차원의 전략처럼 보인다. 억새는 이름 그대로 초지일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한 방향으로 이삭을 만든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만 봐도 시인은 억새보다 갈대에게 태생적으로 끌리는 시심이 흐르는 것 같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시인이 나무를 바라보는 심안(心眼)의 정수는 정독 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서 발동된다. 〈아버지의 빈 밥상〉이라는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심상에 떠오르면서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지 않을 수 없다.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바닷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아버지의 빈 밥상

참고: 고두현의 아버지의 빈 밥상 (낭송 김귀숙)https://youtu.be/bn_MoCCv-z4


보리암이 내려다보이는 토담집에서 “몸보다 마음이 불편했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자간에 말없이 통하는 사연의 서글픔이 파도 소리에 실려 보리암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듯하다. 이렇게 자연의 모든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예고 없이 옛날의 풍경을 현실로 데리고 온다. 그래서 이영광 시인의 〈소금창고〉는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고 읊은 게 아닐까.


자연이 담고 있는 사연은 사람이 품은 사연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전해주는 생태학적 지혜는 그 어떤 교과서에도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지혜다. “자연은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아왔다. 그리고 인간은 그 각각의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들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245쪽). 자연에서 자생하는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배워야 할 이유다, 나무는 자연의 생명체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조용하지만 무릎을 치는 깨우침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업의 근본(根本)과 기본(基本)에도 나무가 들어가 있다. 본(本)이라는 글자는 나무 목(木)이 세찬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 있는 형상이다. “뿌리에 가로 줄을 그으면 근본 본(本)이 된다. 나무의 근본이 뿌리라는 의미다. 가로줄을 가지에 짧게 그으면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뜻의 아닐 미(未), 길게 그으면 가지 꼭대기라는 뜻의 말(末)이 된다”(112쪽). 나무의 줄기처럼 ‘줄기차게’ 사업이 번창할 때도 있지만 미지(未知)의 세계에 도전하다 보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서 미완성(未完成)의 작품으로 남는 사업영역도 있다. 미완성(未)에서 완성(末)으로 향하는 여정에 사업가의 열정과 도전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완성은 관념적 희망, 허망한 꿈일 뿐이다. 목적이라는 완성을 향해 오늘도 어제와 다르게 흔적을 축적해서 어느 순간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적을 꿈꿀 뿐이다. 



관리자는 평면적으로 결합하고 리더는 입체적으로 융합한다


주어진 자리에서 가장 치열하면서도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무 덕분에 한 여름의 녹음이라는 그늘에서 쉴 수 있고, 불타는 가을 단풍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면서 축적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기적으로 살아가야 한 분야의 깊이 있는 내공을 축적할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고독한 몰입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완결된 사업은 없다. 언제나 부단히 도전하면서 어제와 다른 작품을 만들어가려는 안간힘이 있을 뿐이다. 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릴수록 뿌리가 뽑히지 않기 위해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사업가 역시 남들이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필살기를 개발하기 위해 오늘도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 전쟁과도 같은 사투를 벌일 뿐이다.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는 사업의 지혜도 나무가 가르쳐준 생태경영의 지혜다. 뿌리를 깊이 내려야 뿌리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CEO일수록 세상의 흐름에 야합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사업의 근본을 파고들어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본질적인 노력을 전개한다. 이 책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나무를 비롯해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들의 삶과 경영에 색다른 관점과 통찰로 연결시켜주는 시인의 자연생태경영 지침서다. 



자연은 인간의 계획과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 역시 장기 비전과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다. 이런 점에서 나무는 방랑하는 예술가다. 나무는 자신의 씨앗이 어느 곳에 떨어질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바람에 날아가다 떨어지는 곳이 바로 자신이 살아갈 자리다. 나무는 계획이나 의도롤 선택한 결과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라기보다 사전에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우연한 마주침이 수시로 일어나는 자연 표류의 결과다. 나무는 환경에 따라 표류하면서 부딪히는 돌발적 변수가 낳은 우연의 산물이다. 목재는 운 좋게 씨앗이 날아가다 비옥한 땅에 떨어져 자라다 목수에게 목숨이 끊기는 나무다. 반면에 분재는 씨앗이 날아가다 바위틈에 떨어져 성장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며 뒤틀리는 인생을 살다 분재 채집가에서 발견되어 평생 양지바른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백년해로 하는 나무다. 태어난 자리나 사업을 시작한 환경을 탓하는 사람에게 나무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엄중한 깨우침을 준다. 씨앗이 떨어진 그 자리가 내가 목숨 걸고 살아갈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나무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자리 선택권은 없고 오로지 자세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나무는 선택한 자세가 나의 자질과 역량을 결정해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업가 역시 사업을 시작하는 환경이나 영역을 탓하기보다 사업에 임하는 나의 자세와 태도 사업가의 자질과 역량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지표로 작용한다. 



“노하우가 과거형 정보와 지식의 평면 결합이라고 한다면, 노왓은 미래형 지혜와 성찰의 입체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영 현장에서도 주어진 역할만 해내는 사람은 단순한 ‘관리자’이고 앞으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움직이는 인재는 ‘리더’다”(176쪽). 관리자와 리더의 차이에 대한 수많은 주장이 있었지만 노하우와 노왓, 평면결합과 입체융합과 같은 개념적 차이로 명쾌하게 구분하는 시인의 통찰력에서 다시 한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배운다. “노하우는 선택과 집중과 같은 효율성의 영역이고, 노와이는 독창적인 차별성의 영역이다”(177쪽). 결국 기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성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관리자의 영역에서 벗어나 미지의 사업 영역을 개척하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새로운 콘셉트를 디자인하는 리더나 사업가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꿰뜷어 보는 혜안과 안목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그 실마리나 단서가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의 생존 방식이나 살아가는 이유를 남다른 관심으로 관찰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통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무 심는 CEO》는 조용히 항변하고 있다. 알량한 과학적 지식과 개발지상주의 패러다임으로 자연을 자본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을 멈추고, 위대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원천지가 바로 자연 생태계임을 각성할 때 지금 우리가 겪는 지구 온난화를 비롯해서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떠오를 것이다. 생태계를 파괴해서 생계가 걱정되는 전대미문이 팬데믹도 생태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인간의 대오각성이 동반될 때 비로소 극복 가능해질 것이다.



처지가 입장을 결정하고 배경이 전경을 결정한다


숲의 건강이 그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개성이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듯이 CEO가 이끄는 조직 역시 건강한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직을 구성하는 저마마다의 인재(人材)들이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쓰임새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활용하는 능력이다. 나무가 자란 환경이 나무가 쓰일 용처(用處)를 결정한다. 기둥으로 쓰일 나무와 서까래로 쓰일 나무는 나무 자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결정한다(적지적수適地適樹). 한 사람은 전문성이나 능력은 그 사람의 독립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고, 주변 환경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다. CEO가 주어진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인재를 채용할 때는 그 인재가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인간관계를 맺고 자라왔는지를 우선 봐야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전문성은 그 사람이 맺어온 사회적 인간관계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입장이 처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처지가 입장을 결정한다. 나무가 자란 처지는 나무가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나무 심는 CEO》에서 CEO가 적지적수(適地適樹)에서 자란 나무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심는 이유는 저마다의 나무가 자기 강점을 드러내는 명목으로 육성하려는 데 있지 않다. 생태계가 살아 움직이는 이유도 생명체의 다양성이나 다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EO가 나무를 심는 가장 큰 이유는 나무마다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생존 방식과 살아가는 이유, 나무의 고유한 개성과 특성이 어울 어지면서 지속 가능한 숲처럼 지속 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숲이 다양성의 보고이듯, CEO가 이끄는 조직도 수많은 인재들이 지닌 고유한 개성과 강점이 하모니와 시너지를 이루면서 멋진 숲의 교향곡을 연주해내는 무대다. ‘이름 모를 잡초’는 인간의 오만한 발상이 낳은 산물이다. 



“저마다 이름과 역사가 있는 풀들이다. 잡초는 없다”(145쪽).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분야에서 근무하는 인재는 핵심인재와 저변 인력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다. 전경은 배경 덕분이고, 스타플레이어는 도움을 준 어시스트 덕분이다. 아메리카노는 뜨거운 물과 뒤섞이면서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에스프레소 덕분이고, 야구에서 선발과 마무리 투수는 중간계투를 담당하는 미들맨 덕분이다. 숲에 사는 모든 나무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갖고 아름다운 숲을 가꾸어 나가듯, 조직에서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인재 덕분이라는 사실도 나무 심는 CEO가 알려주는 소중한 생태학적 삶의 지혜이자 경영학적 안목과 식견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모든 CEO가 이 책을 필독해야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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