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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고 싶은 시인

장석주 시인의《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고

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장석주(2023).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서울: 나무생각.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건축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타성에 젖은 언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발상을 뒤흔드는 언어가 필요할 때 시집을 꺼내든다. 시인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은 항상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들으라는 정언적 명령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귀로 들으며, 같은 목소리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다”(146쪽).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은 29명의 시인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며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257쪽)를 뻗어 건져 올린 풋것들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풋것들은 에두르는 법 없이 사물의 핵심으로 직진한다. 풋것은 무지와 무감각으로,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 눌리고 찌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163쪽). 절제와 압축미로 담아낸 시어는 몸을 관통한 흔적을 얼룩에서 무늬로 바꾸어 언어로 번역해 내는 시심의 산물이다. 


시인은 절망이 오면 절망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또는 희망의 언어로 얼룩진 행간에서 의미를 채굴하고, 낙엽에 쌓인 그리움이 추위에 떨어도 추억으로 한 동안을 버티며 살아가는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시인에게는 시심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을 선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심은 언제나 심심하지 않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5쪽). 누구나 시인이 되면 강물이 훑고 지나간 모래알의 그리움을 긁어내 어루만져줄 비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이가 들어 시심이 무르익으면 새벽이 찬이슬 앞에 머뭇거리다 먼동이 터옴을 시로 번역해 내는 경이로운 작법을 구름에 달 가듯 자연스럽게 포착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착각했다. 쟁반에 맴돌던 달밤의 낭만이 소나무 가지가 속삭이는 연서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싹을 틔우는 순간에도 시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하늘이 품고 있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조응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의 혜안과 안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늘도 시인은 쓰다 남은 메모장에 적힌 그리움 한 조각과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를 붙잡고 새벽으로 향하는 밤의 적막 속에서 끝을 모르는 유영중이다.  


“시는 개별자에게 발화하는 슬픔의 결, 실패의 광휘, 패자의 심오한 승리 등을 포함한 경험에 주목한다. 그것은 시가 고백의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의 멜랑콜리를 소환하고, 한심한 영혼의 낡은 미래를 노래한다. 고백의 언어를 펼치는 가운데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 독백의 만다라, 팬터마임을 시연(試演)하기도 한다”(5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에게는 정답도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한 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만 존재할 뿐이다. 해석이 바뀌면 지금껏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되는 삶의 지혜가 든든한 위로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며, 읽히지 않은 소설 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갈등과 절정의 어느 순간이다. 시인은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시어를 기다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모든 참다운 시는 그 불행의 참상을 낱낱이 고지하여 기소하고 동시에 사면한다. 그게 시의 숭고한 소명이라는 걸 되새기며, 여기 숭고한 소명을 향해 나아간 시인들과 시들을 불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12-13쪽). 지금까지의 생이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라면 그런 생에게 따듯한 입맞춤 해주며 헐벗은 옷 갈아입혀 따듯한 온돌방에 잠재우고 싶은 마음을 견디다 못해 몇 줄 쓴 시가 이 책 곳곳에서 긴 한숨을 쉬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시인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였음을 증명해주고 싶은 것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켜진 성냥불에 주변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돌아온 지난 생의 어둠을 잠시 잊고 싶은 게 이 책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주변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늪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에 나오는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과 나/희망은 종신형이다”는 구절은 절망과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인의 역발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희망이 우리를 자주 속인다. 희망이 절망보다 더 가혹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도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있는 죄수들이다”(24-25쪽). 절망의 종신형이 아니라 ‘희망의 종신형’이라는 시어 앞에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타성에 젖은 의미로 해석했던 나의 언어사용 방식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의 종신형 앞에서 나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다는 관념의 파편임을 알아차렸을 때, 장석주 시인의 언어는 현실 속에서 진실과 진심을 건져 올리는 서광이나 다름없었다. 시인은 그래서 “알은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32쪽)하고, “머뭇거림과 숙고,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33쪽) 속에서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적확한 한 문장을 완성한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39쪽). 시인은 오르락내리락 우여곡절의 전반전을 뛰고 나서 한눈팔고 딴짓하다 바라본 구름 한 점도 섣불리 흘려보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이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은 서성거림의 방황과 배회가 남긴 시 한 편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고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쪽으로 쏠린 상식과 신념의 종합선물 세트다.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딘지 모르는 중간 간이역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잠시 쉬고 있다.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파고들어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가 시인인지도 모른다.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시가 타오른다


“연애는 상대를 낳는 산파술이다”(64쪽). 비단 연애뿐만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의 뒤안길을 추적해서 잠복중인 새로운 깨달음을 출산하는 산파술의 터전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욕망이 있다. 이 타오름에서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한다”(67쪽). 시인은 바라보되 그냥 바라보지 않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뭔지도 모르는 숙제를 끌어안고 해결을 위한 단초나 단서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만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목소리들’을 쓴 이원 시인의 상상력 촉수는 한 글자로 된 단어의 숨겨진 아픔과 몰래 꿈꾸는 이상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한 많은 세월의 얼룩이 서글픈 사연을 머금다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온다. 차갑게 식은 냉가슴을 달구는 한 잔 술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인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다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의 등불로 번역한다. 하루 종일 수영 하다 지쳐가는 몸을 가누며 물고기가 하품을 하는 순간 숱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물가의 갈대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시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배경의 안간힘을 포착한다. 긴 밤을 뒤척이다 깨어도 여전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도 문득 스쳐 지나는 영감을 포착했을 시인은 그것이 내가 찾는 정답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을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는 장석주 시인이 다른 시인의 삶의 내면과 이면을 파고드는 의미의 산책자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다


이원 시인의 ‘목소리들’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쓴 진은영 시인도 타성에 젖은 교과서적 정의에서 탈피,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하는 짧은 사전을 보여준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언제나 주소 불명의 곳곳에서 날아든다. 정처도 없고 장기간 머물러 살아가는 터전도 없다. 순식간에 날아들다 기분이 내키면 잠시 머무를 뿐이다. “시인은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동시에 이것을 세계에 중계한다”(147쪽). 시인은 언제나 삼라만상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시기에 어제와 다른 문장을 아무 때나 출산한다. 시인의 삶은 하루도 마음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불편함과 불안감이 창작의 꽃을 피우는 앙스트불뷔테의 전형이다. “시인은 모든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들로, 날마다 포효를 하며 제 존재의 벽을 할퀴어댄다”(162쪽). 자기 몸에 새겨진 상처 위에 또 다른 앎의 상처로 덧씌우며 탄생하는 쓰라림으로 애쓰며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이런 고통의 무한 반복이 자신이 없어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시 한 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우주가 들어 있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과 원리가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무릎을 치는 통렬한 깨담음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 기적’을 쓴 반칠환 시인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서늘한 뜨거움을 전해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저 너머에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항해해야 할 가장 넓은 바다와 추지 않은 불멸의 춤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263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저마다의 사유로 작별을 고하고 이별을 경험한 씁쓸한 시인은 새벽이 다가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새벽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럼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 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시인의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걸음 내딛으며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도전하는 한 줄기 시구절을 상상해 본다. 장석주 시인의 시와 시를 해설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 번역해 낸 체중이 실려 있다. 살갗을 파고들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전광석화의 깨달음이 스며드는 이유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쪽). 지층을 뚫고 나오는 글을 쓰기 위해 어제와 다른 삶의 차이를 반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분의 1: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 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나의 인생이력을 짧게 써 봤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서글픈 신발을 신고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그래도 분발하려는 대책 없는 방랑자였다. 30대는 바람 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하는 어설픈 작곡가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 입은 짐승이 내면의 아픈 기억을 어루만지다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섣부른 저자였다. 나에게 오십은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60에는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 데서나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시인의 삶을 살고 싶다.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쓰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도 유유자적하며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산책자이고 싶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애쓰며 상상력의 텃밭에서 비상하는 글을 써야 작가로서의 본분과 작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음을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받았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서늘한 따듯함으로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은 분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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