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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차원이 다른 깨달음이 반복되는 혁명적 사건이다

《경험으로서 예술 1》을 읽고 깨달은 삶과 예술의 의미심장한 관

경험은 차원이 다른 깨달음이 반복되는 혁명적 사건이다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 예술 1을 읽고 깨달은 삶과 예술의 의미심장한 관계


제가 20년 이상 격주에 한 번 모여서 하는 모임이 있다. 대학원생들과 격주 토요일에 만나서 공부하는 인문독서 독해모임이다. 혼자 읽기 어려운 비교적 난해한 책을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며 교양의 두께를 튼실하게 만들어가는 모임이다. 흔적이 축적되면 기적이 일어나는 법, 나름의 사유체계 기반을 구축하고 저마다의 관심주제에 따라 전공의 나무를 심는 방법을 함께 터득하고 공유하는 공부 모임이다. 이번 달에 같이 읽는 책이 바로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 예술》이다.


우선 책을 통독(通讀)하면서 살갗을 파고드는 인두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 밑줄을 긋고, 해당 페이지는 포스트잇 컬러 찾음표를 붙인다. 꼭 염두고 두고 싶은 문장은 컬러 펜으로 색칠을 한 다음 가급적 손으로 나만의 비밀문장 노트에 손으로 기록해 둔다. 굳이 손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손 글씨를 쓰는 동안만이라도 저자가 해당 문장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의중이나 의도를 저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손으로 메모하는 씨줄의 얼룩이 자자가 심어 놓은 책 속의 문장, 즉 날줄과 만나 앓음다운 하모니를 연출할 수 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역작 중에 《경험으로서 예술》이라는 책을 대학원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읽어내고 있다. 여타 번역서와는 다르게 영남대학교를 은퇴하신 박철용 교수님의 고뇌에 찬 번역 덕분에 고전(古典) 임에도 불구하고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는 읽기에서 벗어나 비교적 이해를 쉽게 하면서 같이 읽어내고 있다. 친절한 해설과 함께 듀이 전공자답게 듀이 철학을 관통하는 철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개념의 근간을 관통하는 통찰력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촉진하는 노력이 돋보이는 역서다.



한 챕터를 통독한 다음 저자가 이 챕터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나 인두 같은 문장을 중심으로 챕터의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를 밑줄 친 문장을 중심으로 메모한다. 해당 챕터의 핵심 메시지는 주로 챕터 제목에 집약되어 있다. 책의 전체 메시지는 책 제목에 농축되어 있듯이 각 챕터별고 저자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소제목에 집약되어 있다.  


챕터별 목차 제목에 담긴 의미와 시사점을 생각하면서 챕터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저자의 메시지가 담긴 인두 같은 문장을 손으로 메모하면서 이들 간의 논리적 관계나 전후좌우 영향력 관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해(圖解)시켜본다. 저자의 핵심 개념이나 문장에 담긴 주장의 사연과 배경, 추구하는 과정, 결과적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종국의 메시지나 개념적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도를 그려본다.


많은 책을 읽는 다독(多讀)도 중요다. 하지만 정독(精讀)이 뒷받침되지 않는 다독(多讀)은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독서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지만 정독하지 않는 그 어떤 독서(讀書)도 독소(毒素)로 변할 수 있다. 여러 권을 읽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독서가 더 필요한 이유는 독서는 나만의 지식을 창조, 자기 특유의 사유체계를 건축하는 밑거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듀이의 경험철학은 경험과 예술을 동격으로 보는 ‘경험으로서 예술’과 예술은 감상과 비평과 투자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을 구분한다. 일상적 경험과 분리된 초월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철학은 신체가 지닌 감각적 체험과 육체적 욕망을 이상이나 정신과 분리하는 이분법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듀이는 비판한다. 듀이의 ‘예술로서 경험’은 경험과 예술을 분리시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하기에 일상적 삶에서 경험하는 예술적 요소에 주목한다. 즉 예술은 경험적 조건이나 문화적 풍토와 무관하게 창조되지 않는다. 


“경험은 자아와 사물과 사건으로 구성된 세계가 완전히 상호 침투되어 하나가 된 경지”(p.50)이자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 수반되는 하나의 사건이다”(p.89).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종의 혁명이다. 똑같은 경험이 두 번 반복되는 경우는 없다. 모든 경험이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와 접속할 때 생명체는 직접 경험을 하면서 갖게 되는 질적 특성, 즉 질성을 경험”(p.57)하는 환희의 순간이다. 따라서 “경험은 그대로 고여 있는 호수의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다”(p.90). 강물은 흐르는 매 순간이 낯선 환경과 마주치는 사건이자 언제나 낮은 자세로 배우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사람의 겪어나가는 모든 경험은 경험이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하는 교변작용(transaction)이다.



표현 대상과 표현 행위, 지각 대상과 지각 행위가 상호 침투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내용이나 재료가 형식과 통합되는, 즉 “트럭이 물건을 싣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갖는 것과 같은”(p.250) 것처럼 완전히 하나로 통합될 때 천부적인 실험가를 넘어 모험가로서의 예술가는 ‘체험의 환희감’에 젖는 ‘하나의 경험’을 만끽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경험’이란 경험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으며, 일정한 목적을 갖고 시작해서 다양한 장애물을 만나 저항을 극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감이나 희열감을 맛보는 완결된 경험을 말한다. 온갖 장애물과 만나 사투를 벌이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이루고 싶은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의 희열감을 상상하며, 저항과 맞서 싸우는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바로 예술적 창작과정을 통해 겪는 ‘하나의 경험’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예술가는 기법과 수단을 활용, 재료와 내용을 활용하여 일정한 형식미를 갖추는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 속의 질서로 나타나는 리듬감을 맛본다. 이때 예술가는 하나의 상품으로써의 예술품이 아니라 경험의 매단계마다 이전 경험을 근간으로 새로운 경험을 흡수-통합함으로써 대립과 축적, 긴장과 이완, 흥분과 고요의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이때 심미적 질성이 발현되는 완결된 경험, 즉 하나의 경험을 축적한다. 완결된 경험은 또 다른 시공간에서 앞으로 다가올 경험을 해석하는 인식의 기반으로 작용하며 다른 경험과 만나면서 이전과 다른 경험적 해석틀을 축적해 나간다.



듀이에 따르면 예술적 창작 과정은 다양하면서도 서로 대립되는 요소들을 작품 속에 수용하여 하나의 전체를 엮어내는 능력(p.357)이라고 말한다. 이때 예술가는 사물이나 재료의 배치나 간격을 통해 작품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표현대상의 움직임이나 멈춤을 통해 일정한 리듬감을 살려내려는 과정에서 에너지의 이완과 방출, 결합과 응축을 통해 현재 도달된 상태보다 완성을 향해 부단히 애간장을 태우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리듬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리듬감도 맥락의 변화에 따라 순간순간 관여되는 수많은 요소들의 관계가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창작의 희열감을 맛보는 것이다. 


예술가의 창작과정은 중용 23장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즉 

誠則形(성즉형)하고

形則著(형즉저)하고

著則明(저즉명)하고

明則動(명즉동)하고

動則變(동즉변)하고 

變則化(변즉화) 과정과 유사하다.





이것을 운동을 통해 근육이 생기는 과정에 대입해 보면 재미있는 연관관계가 생긴다. ‘출근’과 ‘퇴근’ 사이에 살아가는 수많은 근육들이 어느 날 저마다의 근력을 자랑하면서 난국 타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간신히 출퇴근하던 후줄근한 근육부터, 몸을 단련하면서 내 인생의 최측근이 되어 칼퇴근할 만큼 삶의 배양근으로 등극한 근육까지 모두 참석한 전대미문의 자리였다.



정성을 다해 차근차근 근육을 만들고 있지만 별다른 근육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미적지근’ (誠則形),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신히 운동을 이어간 덕분에 서서히 근육의 이미지가 보이는 ‘벅적지근’(形則著), 참고 견디며 운동을 계속 이어가는 와중에도 비근비근 온몸이 흔들려 걸을 때마다 맥이 없지만 그럼에도 근육의 형태가 조금씩 드러나는 ‘파근파근’(著則明), 달착지근한 근육 맛에 빠졌지만 여전히 피곤함을 호소하는 ‘노근노근’과 슬근슬근 근육 모습이 드러남을 반가워하지만 끈질기게 근육 단련을 거듭하려 안간힘을 쓴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근육의 변화를 알아주는 ‘질근질근’(明則動), 근육이 피부를 뚫고 팽창하며 외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사실무근의 이야기를 자랑하며 스스로 감동하는 ‘두근두근’(動則變), 마침내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온몸으로 전율하는 감동이 주변 사람에게까지 퍼져나가는 울근불근 느끼는 ‘불근불근’(變則化)이다.




미적지근한 근육이 보여주는 형식과 리듬은 매 순간 운동하면서 심미적 관계의 반복이 다르게 전개되면서 벅적지근, 파근파근, 노근노근, 질근질근, 두근두근, 울근불근의 상태로 발전하는 가운데 차원과 성격이 다른 형식미가 드러나고 리드미컬한 상태로 혁명적으로 변화를 겪는다. 근육이 발전하면서 운동하는 자세와 태도, 동원되는 기구와 재료, 운동하는 내용과 형식이 리듬과 균형을 이루어나가면서 운동하는 사람의 심미적 경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성취감을 맛보면서 하나의 경험은 매 순간 완결된 경험으로 몸에 각인된다.


“질서가 없는 혼란도 불쾌하고, 새로움이 없는 권태 또한 불쾌”(p.333)하다는 듀이의 지적은 모든 예술적 창작은 극도의 혼란감과 극심한 불안감, 낯선 저항과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과 맞서 싸우면서 겪은 경험이 또 다른 낯선 상황과 부딪히며 겪는 경험과 통합되는 가운데 생기는 심미적 각성의 산물이다. 예술을 일상적 삶과 분리시켜 박물관으로 데려간 자본주의적 상품논리에 맞서 불확실하고 의문 투성이자 불안감이 가중되는 일상경험이야말로 행복의 필수요소인 미적 지각의 원천이자 예술적 창작의 본산지임을 이 책 전반을 통해서 듀이가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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