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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게 질문이자 울림이다

당신은 내게 질문이자 울림이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기도 하고,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도 한다. 읽은 책이지만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책도 있고, 분명 밑줄을 친 문장이지만 왜 밑줄을 쳤는지  이유가 기억창고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책을 읽는 이유는 나와 다른 생각에 접속해서 낯선 생각을 잉태하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깨달음의 메시지로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통해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로 나는 지식창조 독서법을 통해 남의 책을 읽고 나의 책으로 다시 전환하기 위해서 읽는다. 책에 빠져 읽지만 읽고 나면 책에서 빠져나오는 이유다.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지식창조 방법은 책마다 밑줄 친 문장을 비슷한 주장이나 주장을 관통하는 사유체계의 흐름을 엮어서 한 편의 글로 엮어보는 방법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밑줄 친 문장들이 골과 결이 다른 저마다의 저자의 주장이 글을 읽은 독자의 사유체계에 따라 다시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또 다른 글로 재탄생되는 과정에서 저자의 사유와 다른 독자의 사유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래 글은 최근에 읽은 책들의 밑줄 친 문장을 내 마음대로 흐름을 조정해서 작성하며 읽은 후에 내 몸에 남은 흔적들을 주워서 엮은 문장들의 향연이다. 아직도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며 어둠의 이불을 덮고 있는 문장도 있고, 늦가을의 처량한 낭만 속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문장도 있다. 아직도 꿈속에서 환상을 꿈꾸는 문장도 있고, 긴 침묵을 깨고 한낮의 일광욕을 즐기는 문장도 있다. 나는 그 문장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꿈꾸며 다음 문장과 만날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



김상욱(2018). 《떨림과 울림》. 서울: 동아시아.

김승희(1985). 《33세의 팡세》. 서울: 문학판.

김연수(2010).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서울: 마음산책.

김연수(2010).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서울: 마음산책

김연수(2022). 《청춘의 문장들》. 서울: 마음산책.

박주영(2021). 《법정의 얼굴들》. 서울: 모로.

론 프리드먼(지음), 이수경(옮김)(2022). 《역설계》. 서울: 어크로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옮김)(2022). 《나보코프 단편 전집》. 서울: 문학동네.

올리비에 푸리올(지음), 조윤진(옮김)(2021). 《노력의 기쁨과 슬픔》. 서울: 다른

우치다 타츠루(지음), 송태욱(옮김)(2021). 《어른이 된다는 것》. 서울: 서커스.

이기철(2005). 《가장 따듯한 책》. 서울: 민음사.

칩 히스와 댄 히스(2018). 《순간의 힘》. 서울: 웅진 지식하우스

페르난두 페소아(지음), 배수아(옮김)(2014). 《불안의 서》. 서울: 봄날의 책.



우리 모두는 세상에 던져진 질문이자 울림이다


“어쩌면 삶은, 질문에 답하며 문장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 길에서 만난 당신은 내게 한 개의 질문이다. 우린 모두 세상에 던져진 질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질문이자 응답이다”(박주영, 2021, p.9). 사람은 저마다의 질문을 품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이야기 역시 질문이 질문을 만나 서로에게 의문을 풀어나가며 의사소통하는 관계 만들기로 해석된다. 다양한 사람만큼 그 사람이 품고 있는 태생적 질문도 다양하다. 평생을 연구해도 풀리지 않는 질문도 있고,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도 있다. “철학은 뭔가 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다루기 위한 기법이다”(53쪽). 우치다 타츠루의 《어른이 된다는 것》에 나오는 말이다. 한 가지 의문은 누군가에게는 무료한 일상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노력해도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의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이상이 되는 현실은 얼마나 슬픈가”(박주영, 2021, p.63). 가진 자가 누리는 지루한 일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이상 세계다. 또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보면 “누군가에겐 너무나 쉽고 흔해빠진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매 순간 고통이다”(박주영, 2021, p.97). 아무런 고통 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고통인 사람을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반복할 수도 없어서 공감하기도 어렵다.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자기 존재감을 알리는 신호를 무수히 보낼 것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자신의 저서, 《떨림과 울림》에서 이런 인간의 존재방식을 떨림과 울림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김상욱, 2018, p.6). 고통은 아픈 사람이 보여주는 떨림이고, 그 떨림에 반응해서 보살핌으로 다가가는 보호자의 움직임은 울림이다. 물리학적으로 말해서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김상욱, 2018, p.7). 다른 존재의 떨림을 감지하고 울림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 들어보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공감은 생각처럼 머리로 재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몸으로 체감하는 감각적 각성에 가깝다. “나는 다독이 책의 권수라기보다는, 읽는 행위의 진지함과 꾸준함, 횟수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짧게라도 자신의 업무와 무관하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깊이 꾸준히 읽는 게 중요하다”(박주영, 2021, p.353). 모든 걸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간접경험을 통해서나마 공감에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저자의 경험을 내가 동일하게 반복할 수는 없지만 간접경험을 통해서 어떤 감각적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에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면의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외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능력은 깊이 읽기를 통해서 생길 수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면서 더욱 심각해진 문제는 비대면으로 인간적 접촉 기회가 줄어드는 데 있지 않고 점차 사람을 만나도 외면하는 데 있다. “대면의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외면이다”(김찬호, 2022, p.123). 김찬호 교수의 신간, 《대면 비대면 외면》에 나오는 말이다. 외면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 바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다.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경청(傾聽)은 경청(敬聽)이다”(김찬호, 2022, p.212). 경청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 섬세한 배려가 우선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섬세함과 예민함의 차이는 무엇인가...전자가 상대방의 존재에 마음이 닿아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에고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섬세함은 자연스럽게 내면에 귀 기울이면서 기쁨과 슬픔, 평온함과 고통을 기꺼이 나누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예민함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생존본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면서 결국 고립을 자처하게 된다”(김찬호, 2022, p.229-230). 섬세한 배려보다 예민한 반응이 앞서면서 인간관계는 더 이상 가까이할 수 없는 경계가 생기고 넘을 수 없는 벽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싣고 그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몸으로 겪어봐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의도로 그런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지 역으로 파고들어 가 심중을 가슴으로 느껴보고 머리로 생각해보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노력이 바로 론 프리드먼이 《역설계》에서 말하는 역설계 전략이다. “역설계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 가 숨겨진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상물이 설계된 원리,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재현할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역설계란 일테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조리법을 추론하는 것,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코드를 파악하는 것, 공포영화를 보고 내러티브 구조를 포착해내는 것이다”(론 프리드먼, 2022, p.32). 역설계는 역지사지 수준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생각의 저변에 작용했던 근본적인 원리나 보이는 것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힘은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판단을 내리는 근본적인 동인을 파헤쳐 오리지널 설계자 입장에서 설계해보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원동력이나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는지 물어보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행복한 일은 견디면서 누릴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론 프리드먼은 “가르치는 능력은 전문성에 비례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잘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른 능력”(283쪽)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론 프리드먼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문능력을 지녔다는 사실 자체가 가르치는 능력을 방해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잘할수록 그 방법을 설명하는 일에 서툴러진다”(283쪽)고 말한다.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런 지혜를 갖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절차나 과정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경우가 많다. 자신도 모르지만 어제와 다른 연습과 반복으로 작은 흔적이 축적되어 설명하기 어려운 경지의 전문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에 나오는 통찰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라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269-270쪽). 확실한 프로세스를 따라가면 전문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최고의 한 가지 방법이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확실성과 복잡성의 변수를 상수로 인정하고 확신보다 의심, 권위보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끊임없이 실험을 반복하는 가운데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과학적 이론이나 통찰력이 세상을 이끄는 전환점을 제공해준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뭔가에 헌신적으로 몰입하고 열정을 갖고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 자기 일을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어제와 다른 낯선 관문을 열어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는 여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인두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83쪽). 특히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면서 그 과정을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그 과정에 투자하는 발견적 열정으로 뭔가를 성취하는 행복한 즐거움이 난국을 돌파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힘이 되어준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완전히 소질 될 때까지 글을 쓸 수 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김연수, 2022, p.84).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정해서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몰입해서 열정적으로 즐기는 과정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이런 몰입과 열정이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259쪽) 길이 열리고 그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고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낀다.



세상은 온통 시집이지만 시어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내가 하면 신나는 일은 책상에서 알아낼 수 없다. 나의 존재 이유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과 행동을 통해서만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즉 ‘견디면서 즐길 수 있고, 그런 일을 통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완벽하게 알아낸 다음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안다면 행동할 이유도 없다. 이해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다”(53쪽). 올리비에 푸리올의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통찰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행동이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137쪽)는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순간의 힘》에 나오는 통찰과 맞닿아있다. “보다 찬란한 절정의 목숨을 위하여 나는 목매달아 죽을 밧줄을 매달 큰 못이 필요하였네. 그리고 그 못의 이름이 시라네”(9쪽). 목숨을 걸만한 일이 시 쓰기라는 사실을 발견한 김승희 시인이 《33세의 팡세》에서 밝힌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절창이다. “시는 말의 피다/한 방울 수혈로 꽃피는 언어들/시는 언어에 피를 돌게 한다.” 이기철 시인의 시집, 《가장 따듯한 책》에 나오는 ’시법‘이라는 시의 일부다. 시인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피나는 노력 덕분에 피를 돌게 만드는 언어들이 시심을 담고 심장을 두드린다. 하지만 “오늘도 지붕 위로 엽서만 한 저녁이 내린다. 그러나 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이기철, 2005, p.5). 엽서를 가득 채운 저녁이 다가오지만 정작 그 엽서에 적을 시는 떠오르지 않는 난감함 앞에서 시인은 밤을 관통하며 새벽을 잉태한다. 다가오는 내일의 저녁을 기대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열정을 다 불태우는 노력만이 나를 살리는 길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긴장감 속에서도 이완이 필요하듯, 힘들여 애쓰다가도 힘을 빼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때가 아닌데 억지로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프라이팬을 태웠을 때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미친 듯이 문질러 닦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담근 채 내버려 두는”(올리비에 푸리올, 2021, p.9) 지혜도 필요하다. 힘들어야 없었던 힘도 들어가지만 힘 빼고 느긋한 여유를 가질 때 보이지 않았던 익숙한 세계도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니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니까”(김연수, 2022, p.200). 난초 이파리 위에 머물던 이슬방울이 짙은 봄빛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평소에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내 주변에서 늘 그 자리에 있었던 현상도 틀에 박힌 일상으로 전락하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텃밭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눈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새롭게 다시 바라보는 시선에서 일상은 시인의 상상력과 시심을 품고 있는 터전이다.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인이다.” 이기철 시인의 《가장 따듯한 책》 시집에 나오는 ’들판은 시집이다‘의 일부다. 들판은 이미 시집이고 풀과 꽃들은 들판을 무대로 노래하고 춤추는 시인들이다.



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일정한 방향, 정상적인 발상, 익숙한 시선에 고정되었던 내 생각도 틀 밖으로 끌고 나와야 내가 어떤 신념체계에 구속되어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뜻밖의 가능성은 사유의 식민지적 속성에서 탈피하고 당연함의 세계에 시비를 걸 때 부각된다. “어딘가에 속하는 것은 진부함을 의미한다”(412쪽).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에 나오는 말이다.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일정한 분류체계 안으로 귀속되는 순간, 틀 안에 갇혀서 틀 밖의 사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 시작한다. 이럴 때일수록 나를 휘감고 있는 분류체계의 범주에서 벗어나 낯선 범주와 이전과 전혀 다른 관계 맺음을 시도해야 생각도 틀에 박히지 않고 엉뚱한 발상이 시작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어딘가에 소속된 진부한 분류체계를 벗어나 다른 낯선 것과의 색다른 만남을 시도할 때도 언제나 사유의 기반은 땅에 두어야 한다. 구체적인 현실과 일상성, 내 몸이 관여하는 신체성에 기반을 둘 때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을 관통하는 언어적 사유사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온갖 담론과 논의가 땅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닐 때, 참을 수 없는 인식의 천박함이 고개를 든다. 이기철 시인이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라’는 시에서 주장한 것처럼 “추상이 지배하는 인생은 불행한 이유”다. 감추고 있는 눈물과 함께 가슴 아픈 삶의 뒤안길을 걸어가는 시인의 마음이 엄동설한을 견디게 만드는 따듯한 위무(慰撫)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역시 이기철 시인의 ‘따듯한 밥’에 나오는 시구절의 일부다.


타자의 아픔을 살피고 헤아리는 가운데 내가 먼저 그 사람의 아픔을 경험하는 가운데 느끼는 체감을 실감 나게 전달하는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감수성이 살아있는 한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삶의 지반이 생긴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368쪽).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나보코프 단편 전집》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은 익숙하고 식상한 대상이나 현상이지만 그것이 일상의 세계를 넘어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로 미래를 지향할 때, 그리고 미래의 언젠가 지금 여기서 고뇌했던 일상의 화두가 시대를 관통하는 사유체계의 기반으로 자리 잡을 때, 그런 기쁨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고민했던 화두는 비슷하지만 고민하는 주체의 경험과 인식, 그리고 그 주체가 놓여 있는 상황이 바뀌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의 연결망이 새롭게 부각될 수도 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287쪽). 김연수 소설가의 《우리가 보낸 순간, 시》에 나오는 명문이다. 내가 읽고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 나의 미래를 아름답게 바꿀 것이라는 문장은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서 지금 당장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상 명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는 이기철 시인의 ‘카뮈’라는 시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미어오는 전율감을 주체할 수 없다.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글을 잘 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욕구만 놓치지 않는다면 잘 쓸 수 있다. 좋은 글을 계속 읽고 따라 써 보면 자연스레 문장이 익숙해지는 상태를 거쳐, 고유의 스타일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지치지 않고 계속 욕망할 수 있느냐다”(p.355). 박주영 판사의 《법정의 얼굴들》에 나오는 말이다.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려는 안간힘과 애쓰기가 책 쓰기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문장이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와 삶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바로 거기가 글쓰기가 막히는 지점”(박주영, 2021, p.355-356)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책을 읽고 쓸 수 있다. 내 삶을 능가하는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당연히 쓸 수도 없다.


“글쓰기란 계속해서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처음에 불완전하게 썼던 문장을 다음 문장으로 계속해서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30쪽). 올리비에 푸리올이 쓴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쓰기는 오로지 쓰기를 통해서만이 향상된다. 글 짓고 책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이나 강좌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쓰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생각을 언어로 번역해서 쏟아내야 생각의 불완전함이나 정리되지 않은 복잡함이 단순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말이 글로 변신을 거듭한다. “자아와 삶의 투사가 바로 글이므로, 하루하루 겁 없이 살아가듯 두려움 없이 아무 말이나 써 내려가면 된다. 나머지는 앞서간 글이 끌고 가도록 맡겨두면 된다”(박주영, 2021, p.356). 앞 문장이 백지위에 흔적을 남기면 그 흔적이 다른 문장을 불러와서 뒷 문장에 자리 잡는다. 놀랍게도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마 생각 밖으로 빠져나간 문장이 다른 문장을 물고 늘어지면서 생각열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글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잡는 도구다...마음이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나는 일단 아무 말이나 쓰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내 마음은 글을 통해 포집되고 박제된다. 아무 생각이 글로 쓰이는 순간 해석의 대상이 된다. 비로소 나는 글로 평온해지고, 글이 부여한 질서에 속박된다”(박주영, 2021, p.356).



내가 글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지배하는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저자가 텍스트를 쓰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저자를 불러다 글을 쓰게 만드는 역전현상이 나타난다. 글은 배워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배우는 거다. 이런 점에서 중단 없이 날마다 애쓰는 과정만이 책을 쓰게 만드는 작가들의 비결이 아닐까.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222-223쪽). 김연수 소설가의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된 다음 그걸 글로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그 글이 나를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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