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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신체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느낌을 아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의 강연을 듣고 나서


문장이 신체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느낌을 아십니까?


전방위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 한 권의 책이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한 가지 이슈를 깊이 천착할 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관점으로 해결의 실마리나 단서를 제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궁에 빠진 듯, 그것이 왜 해결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해의 지평은 열리고 인식의 깊이는 심화되어가지만 우치다 타츠루 교수님의 안목과 혜안은 난해한 사상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나 에피소드를 통해 막힌 인식의 관문을 열어젖히는 돌파구 역할을 한다. 그 후로 우치다 타츠루 교수님 책을 거의 다 읽어내는 전작주의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난 월요일, 한국을 방문해서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었던 우치다 타츠루 교수님은 예기치 못한 사연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셨다. 우치다 타츠루 제자이기도 한 박동섭 교수님과의 협의 끝에 화상으로 연결하고 박교수님이 직접 한양대에 오셔서 통역을 하는 방안으로 대면 세미나가 비대면 세미나로 대체되는 안타까움은 있었다. 하지만 라이브 강연처럼 화상에 비친 우치다 타츠루 교수님은 나이가 드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피카소의 말을 연상시켰다. 호기심 어린 눈망울과 각본 없이도 주어진 주제에 대해 방대한 지성의 향연을 펼쳐가면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와 소통, 그리고 신체성의 역학관계를 근본적이면서 비판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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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에 이른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만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생각이나 감정을 미적분하듯 잘게 쪼개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해상도’, 복잡한 문제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거꾸로 매달린 채 얽힌 실타래를 풀 듯, 지적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지성의 폐활량’, 주어진 문장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분기점의 다양화’와 같은 수많은 독창적인 개념을 창조한다. 문제의식이 거룩하고 무도를 가르치며 단련한 신체성을 기반으로 전방위적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까닭에 문장이 신체를 파고들어 파장을 일으키고 깊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는 ‘논리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논리성과는 다른 정의다.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문제가 풀리지 않고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내 생각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접속해서 낯선 생각이 잉태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내 생각도 틀릴 수 있고,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빨리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에 접속, 전혀 다른 생각을 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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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입니다(9쪽).”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교육학자가 아니면서 교육적 교훈이나 메시지를 신랄하면서도 통렬하게 제시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아를 기르는 교육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지향적 교육의 한 가지 모습이다. 대답이나 정답보다,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고의 방향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알 수 있는 세계보다 알 수 없는 경이로운 세계가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성뿐이다. 알 수 없는 정보를 ‘알 수 없는 정보’로 둔 채 시간을 들여 묵히는 미뤄 놓기 능력은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다”(36쪽).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 지향》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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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문장은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문장이 신체 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94쪽). 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에 나오는 표현이다. 우치다 교수님의 책은 한 가지 전문지식으로 한 가지 주제를 파고드는 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핫이슈를 붙잡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간학문적 접근을 넘어 범학문적 접근으로 경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포착하는 따듯한 집요함과 열정, 그리고 확신에 찬 해결 대안 제시보다 겸손한 질문을 던져 놓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우치다 교수님에 따르면 진정한 글쓰기는 신체가 겪은 앎의 상처를 자기만의 목소리로 녹여내는 과정이다. 머리가 명령하는 언어가 아니라 생각의 광맥까지 파고들어가 심연에 흐르는 욕망의 물줄기를 다시 길어 올리는 가운데 몸이 작동하는 언어로 글을 쓰는 과정만이 살갗을 파고들며 기존 앎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


머리의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맥락에 관계없이 어디선가 배운 지식이나 깨달음을 사전에 구조화시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언어다. 주로 자신이 직접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교훈이나 통찰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습득한 관념적 언어가 바로 머리의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몸으로 겪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듣거나 보는 순간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이나 전두엽을 뒤흔드는 전율감은 없다. 이에 반해 몸의 언어는 맥락적 감수성이 반영된 언어다. 즉 언어를 주고받는 특정 상황에서 나와 상호작용하는 상대와의 교감을 통해 발현되는 임기응변적 언어다. 사전에 패키지화된 형태로 머리에 축적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머리의 언어에 비해 몸의 언어는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창발되는 맥락 의존적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정형화된 형태로 완결된 산물이기 때문에 고정된 명사형 언어다. 반면에 몸의 언어는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적 특수성에 따라서 가변적으로 작용하는 동사형 언어다. 자기 체험이 없는 사람은 머리의 언어를 사용하여 논리적 설명을 통해 이해를 촉구한다. 반면에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적 깨달음이 반영된 몸의 언어는 감성적 설득을 통해 공감에 호소하고 감동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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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된 언어는 심금을 울리지 못하고 맴도는 언어지만 설득된 언어는 폐부를 파고들며 심장에 꽂히는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옳고 그른 이야기로 판단 기준으로 구성되지만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몸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선악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따르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거나 감각적 울림을 자극하는 좋고 나쁜 기준을 선택하는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의 요구나 감정에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발설하는 자기중심적 언어다. 몸의 언어는 상대방이 반응하는 뜨거운 숨결과 신체가 욕망하는 감정에 상응하는 섬세한 타자 중심적 언어다. 머리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매뉴얼이나 테크닉을 개발할 수 있지만 몸의 언어를 구사하는 효율적인 프로세스나 절차는 개발할 수 없다. 몸의 언어는 맥락 의존적 상호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는 생성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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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시종일관 물 흐르듯 사유의 샘물을 길어다 무지한 인지체계를 통째로 뒤흔들어준 우치다 타츠루 교수님의 강연은 고민하던 화두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이전과 다른 문제의식으로 주어진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시 파고들어 재정의하며 탐구하는 출발점을 마련해 주는 강의였다고 생각한다. 아 이제 알았다는 느낌보다 이전보다 조금은 더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는 지금은 모르지만 뭔가 경이로운 앎의 발자취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호기심을 품고 그 세계를 향해 다시 앎으로 상처받는 삶, 삶으로 앎을 재구축하는 공부를 계속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을 것이다. 언어가 더 가난해지고 미천해지기 전에 치열한 독서, 깊이 읽는 독서를 통해 언어를 벼리지 않으면 언어가 나를 버릴 것이고 책(冊)이 책(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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